평창아리랑의 시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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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11-22 21:30 조회4,398회 댓글0건본문
<평창아라리 가사집>은 2005년 평창군 문화관광과 주관으로 이 고장의 전통민요 평창아리랑을 광범위하게 채록하여 집대성란 책으로 평창아라리(아리랑) 1,500여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평창아라리가 가장 먼저 채록된것은 1933년도에 김소운의<조선구전 민요집>에 가장 먼저 수록되어 있다.(제일서방 1933)<조선구전민요집>에 수록된 이후, 1960년 영창서관에서 재 발행되었다. 그런데 1960년본에서는 "아리랑 시리랑'이란 구절이 "아리랑
아리랑"으로, 또 "너머"가 "넘어"로 변해있다.(평창아라리 가사집. 평창군. 2005년 발행 P17)
이 가사는 평창아라리중 제일 처음으로 1933년 <조선구전민요집>에 수록된 이후, <조선민요집성/1948>에 5수가 전하며 <한국민요집1/1961>, <태백의 설화/1974>, <대화총람/1976>에 수록되어 있다.
* 강원일보사 발행 <태백의 설화 上>에 축자왕자 →죽자왕자. 아리랑 시리랑 →아리랑 아리랑, 노다가세 → 노다가서. 그외 능수나버들 →능수아 버들로 변해있다.
위 문장에서 단어의 변화는 오타나 오기록이 아닌 당 시대의 단어 변화들로서 음의 변천과정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강원일보사 발행 태백의 설화는 각 군단위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나타내는 책으로 전 5권으로 되어 있으며, 평창군 편은 4권에 수록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면 1933년 진부면에서 가장먼저 채록된 평창아라리 5수중 하나를 이해해 보자.
-----< 평창아라리중 1933년 김소운에 의해 가장 먼저 채록된 가사 >--------------------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
축자왕자는 팔자도 좋아 긔차에다 몸을 실고 안동현 구경
아리랑 시리랑 아라리야 시리랑 고개로 너머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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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리랑의 가사의 뜻은 단순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가사의 뜻도 모르며 정선 아리랑은 이 가사를 풍자편에 분류하고 있다. 그것은 가사의 역사적 해석을 못한 오류로 이 한 줄 가사도 이해하지 못하며 아리랑 이론가들이라고?? 그러면서 정선아리랑에선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구름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는 600여년전 고려충신 전오륜등 죽림7현이 이 노래을 부르며 송도를 향하여 매일 문안인사를 올렸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만들어낸 날조이상의 가치는 없다.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라는 평창아라리 가사의 해석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사 그대로의 이해이다.
1930년대 오대산 박달나무는 검인인 축자(丑)와 왕(王)자의 검인의 도장을 찍어 제천쯤에 싣고나가 기차화물로 안동에 내려가 장신구등으로 가공되는 것으로 공예품등에 사용되었기에 소나무 뗏목보다 더 비싼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역사적 이야기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다시한다.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가 성립되어야 하는데 위의 만수산 아라리가 600여년전 전오륜등이 불렸다는것은 역사적 이해가 불가한 지점이 분명 있는데 아리랑 이론가라 자처하는 자들은 아리랑의 주변, 특히 역사적 소명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아리랑은 가락이기 이전에 민중들의 애환이 담긴 삶의 소리인데, 아리랑 이론가는 외지 사람들로 그 지역들의 향토사에는 밝지 못하고 아리랑의 일반적인 이해밖에는 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박달남근의 가사에 대하여 본인은 아래에서 충분히 이해가는 당시의 역사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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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
아마도 이 가사의 평창아라리는 1920~30년대에 평창지역에 너른 분포에서 가장 많이 애창된듯 하다.
헐버트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오는 날부터 10년간 하루도 아리랑 가락을 안 들어본 날이 없다 하였듯이 당시 구한말부터 아리랑은 전 국민이 애창한 아리랑 중흥기로 이해해 본다면, 이후 일제 강점기에도 아리랑은 그 맥이 이어졌으며 더욱 발전하여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도 자체적 가사를 만들어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아리랑은 그 지역적, 공간성과 시간성이 축약된 가사가 표출되는것이 생명이고 특징인데...( 단, 진도아리랑은 31수의 제한된 가사로 엄격한 음률을 따르는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1931년 박종기가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러한 고정적, 일률적 가사에 의존하는 진도아리랑은 앞으로의 이야기 제외함을 기준으로 한다)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라는 한 줄의 가사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시에 견고한 고급목재의 오대산에 박달나무가 산판되어 축자나 임금왕자의 검인 도장이 찍혀져 다 나간다라는 뜻이다.
당시 오대산에는 소나무보다 박달나무가 많았던듯하며 고급목재로 당연 소나무보다 값도 더 되었슬 것이고 그러기에 산판쟁이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였으리라.
일제강점때인 1930년대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위에 일본인의 벌목회사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곳을 회삿거리라 부른다. 해방 이후에도 월정사 아래엔 260여호가 살았으며 그들 대부분은 산판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잠시 일제강점기의 조선 사회상을 이해힐 필요를 느낀다면..
1910년에 한일 합방을 깃점으로 국가를 좀 먹은 일본은 도적이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반성은 없어서는 아니된다.그들은 조선을 삼키자 우리의 고질병적인 양반사회는 없어졌다.
당시 안동김씨의 외척세도 60년에 민비의 패도정치에 오죽하면 개화세력인 박영효측의 암살계획에 유길준은 그것은 정당치 못하다는 판단에 비밀을 누설시키고 자기네가 암살하려드는 이러한 시국에 사회상은 암흑 그 자체였다.
양반들은 첩질에 힘도빠져 방바닥에 누워 담뱃대만 물고 지내며 노비들의 생사 여탈권도 손에 쥐고 있는것처럼 노비들에게 린치를 가하며 당시 사회상의 둔화와 지저분한 사회에 페스트, 콜레라등의 발진하게되자 ,,, 언젠가 이야기한 우리는 청게천의 냇물에 빨래하는 여인들의 옛사진을 보며 감회하지만 기실 누런 똥물로 외국인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부인도 그에 관한 위험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암울하고 비 문화적인 조선에서 구한말 아리랑의 자료로서 한국에 땅을 밟는날부터 10년간 하루도 아리랑을 들어보지 못한 날이 없다고 기록하는 헐버트 선교사도 조선은 차라리 일본 식민지가 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한국사랑이 삐뜰러진 것이 아니라 여러 선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양반, 노예의 구분을 어떻게 떨칠 수 있었슬까??
그러한 강점기 20년대엔 우리나라엔 근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공장들이 세워지며 국민들의 손엔 공업화 제품들이 쥐어지게 된다.
위 아리랑 가사중에 안동현이란 표현이 그것이다.
구한말 경복궁 중수에 필요한 소나무를 강원도에서 공출하여 뗏목으로 운반했다고만 알고 있는데 기실 경복궁 주변의 팔판동, 내자동, 효자동, 남산골의 양반집들은 전부 소나무가 팔요한 상태이고 그 골목들을 지나며 보면 얼마나 많은 소나무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 중기엔 치악산 황장송을 궁월 목재로 사용하였지만 더 많은 수요의 나무는 한강의 뗏목을 이용하는 태백산 산간의 나무가 이동되었다. 그래서 1920년대엔 월정사 위에 산판의 벌목공들이 많아지고 일제는 그곳에 목재회사를 만들어서 이후 1970년대 오대산 국립공원이 지정되면서 회삿거리의 많은 주민은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6,25전에는 약 260여호의 인부가 있었다 하며 1,4후퇴시 워커 주한 미 사령관과 김백일 장군의 명령에 군인들은 반발하였지만 이 벌목공 인부들중에 3명이 월정사 당우 21채를 모두 전소시킨다.
물론 당시의 월정사 사정은 50년 6,25이전에 이미 49년에 북괴 무장공비가 월정사를 거점으로 제 1병단을 형성하였기에 9,28 수복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아군이 인천시내를 진압해보니 시내 복판에 있는 해광사라는 절이 북괴군의 소굴로 변해 있었기에 워커장군은 오대산이 제 1병단의 무장공비들과 연계를 염려하였던듯 하고 민간인은 북괴군의 부역을 담당하고 후일 부역자로 몰려 죽는 우를 범하기에 미연에 방지를 위하여 월정사를 전소시킨듯 하다.
아리랑의 가사 박달남근은,,, 1933년 김소운에 의하여 채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때 당 시대에 이 지역 (진부)에서 가장 많이 불리우던 아리랑이였던듯 하며. 그 뜻은 박달나무는 축자 왕자의 일등 품질의 도장을 찍고 당시 구경도 못해본 기차를 타고 안동까지 (출발지는 제천쯤에서) 간다는 서술적 가사의 노래이지 유모와 해학의 장르에 끼여 있어야 할 가사는 아니란 점이다.
아마 20년대엔 우리나라에도 기차와 신작로라는 도로와 경공업이 발달되며 전국 각지에 초등 보통학교들이 설립되어 일본어를 배우게 되지만 아이러니 한 점은 구한말보다 더욱 한글이 보편화되어 누구나 한글을 알고 익혔던 점이라...
이 당시 안동지방에선 목재가공업이 발달되었던듯 하다. 라이터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주머니 속엔 항시 가지고 다니던 성냥의 산업도 안동지방이었던듯 하다.
그래서 축자 왕자 찍으면 아마 소나무보다 더 비싼듯하며 다 팔려나간다는 뜻이라..
단군의 단자는 박달나무 단(檀)자로 박달나무는 단단하고 우리민족의 상징적 나무였던듯하며 단군 도읍지는 아마도 박달나무 집단 서식지였던듯 하다. 이러한 박달나무가 오대산에 많이 자생하였는데 이 시기에 전부 벌목하여 지금은 오대산에 박달나무가 없는듯 유감이다.
또한 오대산의 회사거리는 7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붐볐으나 국립공원이 되며 국립공원 밖으로 철수되었다. 구한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에 그들의 생업은 산판이며 박달나무외 소나무(이 고장 용어로는 강송이라 한다. 물론 춘향목이 고급송이라는등 해봐야 우리나라 소나무들은 한 품종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계,문, 강, 목, 과, 속, 종의 마지막 종의 종자를 이야기할때 한 종자라는 것이다)
평창일대의 곧고 쭉쭉뻗은 강송을 벌목하여 오대천엔 뗏목이 아닌 등걸로 떠내려 보내 조양강 입구의 나전쯤에서 뗏목으로 묶어 한강을 내려간 것이라야 이야기는 맞아 들어갈 듯 하다.
기실 정선 아리랑이 아우지지에 뗏목을 떠 내려보내는 뗏꾼 아리랑도 한몫한다.
이 뗏목은 사북의 핀 꼬까리와 어라연으로 내려가는 황새여울,,, 한 해에도 몇명씩 죽어가며 계곡을 넘어야 했던 과거 뗏꾼들의 삶의 애환을 그리는 뗏목 아리랑의 시발로 아우라지보다 월정사에서부터 조양강으로 흐르는 한강 지류천인 오대천에 더 많은 벌목 소나무를 내려 보냈어야 할 것같다.
그것은 지도를 보면 가리왕산, 중왕산, 백석산, 잠두산, 두타산,에서 비로봉까지 오대천은 이러한 해발 1,200이상의 산을 끼고 돌아 흐르기에 일제강점기에 월정사 위에 벌목회사를 두고 벌못공이 260여호에 이른 것이라 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대산의 진부에서 벌목아라리의 하나인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가 불리워 진 것이다.
여기서 다나간다가 아니라 다 나간다라고 띄어쓰기를 해야 정확한 문법이고 이해가 빠른 것인데 모든 문장엔 이 가사의 이해를 모르는 탓에 붙여쓰기의 오류를 범한다.
이 가사가 평창아리랑중에 가장 먼저인 1933년에 채집된 가사로 당시 산업화 사회로 박달나무는 최 고급 목재로 안동에 내려가서 공예품이 되는데 그러기에 당시에 오대산 일대에서는 소나무보다 더 효자나무인 것이다. 그래서 이 가사는 당시의 사회상을 나타내는 것이지
해학적 가사가 아니란 점이다.
이런게 아리랑의 접근이고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삶의 혼이기에 정선의 이론자들처럼 아리랑 가사의 음률로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역사적 소양을 가지고 이해하여야 한다.
또한, 이 가사의 두번째 음절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하는 가사는 후렴부를 대신하여 본 음절에서 후렴부가 도입되었다.
우선 후렴은 무엇인가??
서양음악에서 후렴은 refrain과는 달리 아라리에서는 addition 소리라고 아리랑 연구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론도 있지만 그런 논리는 전혀 맞지 않고 단어적 특색만 구사한 것이다.
아리랑의 후렴이 부가적 설명의 이해인가 하면 단 한줄의 아리랑 가사만 놓고볼때는 후렴이 부가적으로 아리랑을 이해시키지만 그보다 후렴의 반복적 사용에 후렴의 기능은 리플랙스적이라야 옳은 것이다.
이것은 타 음악이나 서양음악의 후렴은 반복적이고 아리랑의 후렴은 부가적이라면 논리 자체의 형평도 없다. 그러기에 어떠한 노래들도 후렴은 부가적이고 반복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평창아라리는 후렴이 없다. 그것은 평창아리랑뿐만 아니라 과거 정선 아라리도 평창아라리롸 동일한 태백의 영서의 아라리로 이런 지역적인 지금 이론자라 떠는는 자들의 편협적 사고가 아닌 영, 평, 정 아리랑은 동일 공간에 동일 시간성의 아리랑으로 후렴이 없었다.
여기서 확장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런 추상적인 모호한 단어는 의미가 없다.
평창아라리는 지금도 후렴이 없다.
과거 태백산간의 영서지방(평창, 정선, 영월)의 아리랑이 후렴이 쇠퇴하였는지 아니면 후렴이 발생되지 않았는지 모호하고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는 다음 글에서 다루어 보기로 한다.
다음글에서 1940년대에 재즈 발굴로 유명한 미국의 민요학자 로맥스 父子의의한 민요의 기능성 문제에서 유래된듯한 표현의 산의 아라리인 평창아리랑엔 왜 후렴이 없슬까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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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아라리 가사집>은 2005년 평창군 문화관광과 주관으로 이 고장의 전통민요 평창아리랑을 광법위하게 채록하여 집대성란 책으로 평창아라리 1,500여수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상편엔 아래의 이런 글이 실려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의 후렴에서 아라리야는 정선지방의 영향에서 온 것인 듯하며 지역적으로 인접하여 있는 관계로 가락에도 독자성을 별로 찾아볼 수 없으며 본 고장에서는 가사와 가락을 아는이도 별로 없다라고 두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평창아리리 가사집> p18.
그러나 정선 아리랑도 시간과 공간이 평창아라리와 동일하며 과거에 정성아리랑도 평창아리랑처럼 후렴이 없다가 근자에 붙게 되는것이다.
그러기에 평창아라리의 후렴은 정선지방에서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는 이치에도 맞지않는 논리로 편저자인 정장룡(강릉대 교수. 문학박사)는 이 책을 편집하였을 뿐 평창아리랑의 이론적 학설도 아닌 책에서, 아리랑 학자도 아니면서 고집광적인 자기의 논리를 실었다. 그러기에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선입관적인 지식의 편협적인 상태로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보아야 옳다
왜냐하면, 첫째 영서지방의 메나리토리권역대의 아라리의 공간적, 시간적 동일성에서 각 지역적 문화의 특수성의 차이로 보아야 할것인데 평창과 정선이란 구분을 하였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평창과 정선 아라리의 차별적인 거리감이 생겼지만,, 정선 아리랑의 김연갑이 주창하는 아리랑의 郡단위적 성격의 구분은 구한말 시기엔 그러한 郡단위적인 성격은 없었기에 이러한 설은 옳치못한 이야기일뿐이다.
가령, 구한말 정선 아라리가 유행했다면 지금의 정선군 신동면은 그 시절엔 평창군 동면이었다. 그러기에 아우라지를 내려온 땟목은 신동 앞 된 꼬까리 여울의 죽음의 곡예를 하고 영월 어라연으로 내려가는데...
정선 뗏목 아라리의 핵심인 된꼬까리가 그 시절엔 평창땅이라 뗏목아라리는 정선이 아닌 평창땅이라 평창아라리라야 맞는가??
정선 아리랑은 이러한 맞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假 논리위에 假논리를 첨가하는 이상한 假設의 집대성이다.
그러기에 위의 책 역음 편자 두 저자와 또 한 사람 정선아라리에 이론가를 자처하는 김연갑의 郡단위 아리랑의 지역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이론도 아닌 참으로 웃기는 발상이다.
또한 김연갑의 웃기는 발상은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만수산 검은구름이"" 라는 아라리가 아리랑의 현존 가장 시원이라 하는데... 그것이 역사적 기록이 있는가??
나의 그에 관한 글을 보시면 그 잘못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kkks1/835 < "만수산 검은구름~ "아라리 가사는 정선 아라리가 아니라 평창아라랑이다)
또한 아라리 아라리야는 정선지방의 영향을 받았다 하는데 이도 맞지않는 논리모순이다. 정선아리랑(김연갑 저)이라는 3만냥짜리 책을 보면 그 중엔 두마디 이야기가 있다.
그 하나가 정선 부군수였던 연규한 씨가 하는 말로 정선 아리랑은 원레 후렴이 없다가 최근(70년대쯤)에 후렴이 붙여지며 아직도 후렴없이 부르곤 한다고 지적 한다. 돌림노래로 함께 부를때 다음 사람이 미쳐 가사를 선정하지 못하였슬때도 후렴으로 시간을 메꿔 준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위 평창아리랑 책의 두 엮음저자는 자기의 주관적 해석의 책도 아닌데 평창아라리에 후렴이 붙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는 인접 정선아라리의 후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들의 정선 아리랑도 이 시기엔 후렴이 없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이런 엉터리 논리를 평창아라리에 각색하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이 책이 위 두 엮음저자는 그 한문장의 오류라기보다는 평창아라리 가사집 전반부에 정선 아라리가 평창아라리보다느 상위라는 입장을 표현하는 맹목적 선입관을 견지하고 있기에 어느 한 부분 모순이라 표현보다는 이 책 전부에 편견적 견해의 오류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김연갑의 정선 아리랑 책에서 연규한씨에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드네"란 가사가 고려말 전오륜외 죽림칠현이 부른 가사로 이보다 더 앞서는 아리랑 가사는 없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는데 연규한씨의 답이 없자 그럼 이 가사가 600여년된 최고 상한대의 가사로 봐야지요라고 한다.
연씨가 기라면 그대로 인정되고 아니라면 아닌것인가?? 웃기는 발상도,,,연규한씨가 역사에서 정답을 내릴 수 있는것인가??
정선 아리랑 사무총장이라는 김연갑은 아리랑에 관하여 자기의 논지를 필하고 그 안건이 어떠한 학계나 사료 검증도 없이 누구도 터치하지 않는데, 후일 그것을 자기가 인용하여 쓰면 그것이 이론으로 정립되는듯 ... 사실 모든 아리랑의 제 이론들은 그들이 학자도 아니고 타당성의 검증도 없는 이론도 아닌 이야기들뿐이랴.
나는 그래서 김연갑의 3만냥짜리 정선 아리랑책은 더 이상 볼게 없어 차라리 고철장수가 득이라 생각하고 집어던졌다.
또 하나 그의 책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도 보고있는데 그의 책을 보는것은 무엇을 득하자는게 아니라 그들이(정선이)무엇을 거짓말 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이 아리랑 시원책에 절반은 전오륜의 외삼촌인 이색이 오대산에 은거하여 아라리 비슷한 시조를 짓는 논제에 할애하며, 이색의 시조에 만수산 아라리 가사를 접목하려는 생각뿐,,,
하지만 본인은 이 가사는 전오륜이 부른게 아니라 궁휼한 봄철 화전민들이 청옥산에 올라 나물뜯을때의 가사란 점이다.
이렇게 평창아라리(아리랑)의 제 이론을 이야기하려면 이들을 정선아리랑이 편취하여 오류적 해석을 하고잇기에 평창아리랑의 이론적 확립을 위헤서는 정선아리랑의 엉터리 이론을 파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선 아리랑의 이론의 과욕적 오류를 몇개 열거해본다면....
* 정선교육청의 악생들에게 가르치는 학습지도자료엔...
아리랑은 정선에서 시작되어 한쪽은 부산으로 한가닥은 평창을 거쳐 서울로등,,,우리나라의 모든 아리랑의 기원은 정선아리랑이라는
홍교장의 김일성식 억지 세뇌적 주입식으로 아리랑 기원설을 가르친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드네"란 아리랑 가사가 600년전 고려말 충신이 부르던 현존 최고 오래된
아라리 기원설이라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목은이 오대산 은거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런 주장은 당시 조선 개국시의 역사도 모르는, 또한 아리랑의 제 규격도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이 부분에 본인은 그들의 기원설 주장이 오류라는 이론적 이해의 글을 참조 바랍니다.
* 미탄에 한치뒷산(청옥산) 아라리가 현존 남아있는 아리랑의 최고 보고이다.
이 이야기에 정선은 한치는 정선땅이라고 주장한다,,,물론 정선에도 한치는 있다..
평창의 寒峙는 성마령에서 정선 너머가는 고개를 뜻하고 정선에서 부르는 汗峙는 정선 남면 유평리에 있는 작은 고개를 말함이니 정선한치는 조금 앞 뒤가 맞지않습니다 (너브산장님의 참조글)
미탄의 한치 뒷산엔 곤드레 딲죽이가 지천으로 화전민들이 춘궁기에 나물로 연명하며 삶의 고통을 표출하는 나물뜯는 아리랑을 부르는 데.. 정선 남면의 한치엔,,,과거 석탄도 아닌 광물 광업소가 있었듯이 산엔 봄나물 하나도 나지않는 곳이다.
그리고도 한치뒷산에 봄나물 타령을 이야기 할 것인가??
*평창아라리는 지금까지도 메나리조 산의 아라리라 표현하고 있다.산의 아라리란 기능성의 이야기로 알랜 로맥스의 구분에 의한 것이라면 정선 아라리는 산의 아라리라 표현할 수 있는가?? 즉, 후렴을 달며 변모하는 과정상에서 삶의 표현을 왜곡시킨 점이란 뜻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충분히 해석하겠습니다
이렇게 정선 아리랑은 왜곡된 이론의 발판위에 서 잇다,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이론적 속임수를 걷어치워야 평창아리랑의 제 논리를 입증할 수 있기에....
과거 인터넷 발달 이전의 시간대에 강원대의 정선 아리랑 학회가 그 이론적 지지자 역활을 했슬텐데 그들의 기록은 문헌으로나 찾아봐야 할 듯 하지만,,, 그것은 오늘의 정선아리랑의 토양이란 점인데..그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박만일 박사의 아리랑론은 재고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슬 것이고, 더 나아가서 조용호 박사의 아리랑 제 이론,,,진부한듯한 이론들이지만 그것은 아리랑의 구조적 문제일텐데그 많은 논리에서도 단 한줄도 아직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럼 아리랑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사람들은 아리랑의 뜻을 캐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없는 이야기이고 또한 어느 누가 그 뜻을 밝힌다고 해 봐야 그것은 아리랑의 부분적 이야기이지 아리랑 전체를 아우룰수 있는 진부분 집합의 요소는 아닌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점들,,,일반적인 아리랑의 개요와 나아가서 평창아리랑은 아리랑중 유일하게 후렴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랑이란 장르의 역사의 이야기에 정답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유에 근접하고 타당성을 가지는 이야기를 그려 보겠다.
이렇게 한발 한발 부분적으로 평창아라리(아리랑)의 제 이론을 확립해 나갈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민족과 아리랑.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기록에 공허한 점은 무엇인가??
그 많은 사람들의 아리랑 이해의 접근방식이 나의 눈에는 이상하다는 생각까지도 필하겠습니다.
또한, 요즘은 재즈 아리랑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다는데, 물론 좋은 의미이나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서양화풍이기에 우리것의 세계화란 차원으로만 고집하면 어패가 다가올 것이다. 세계화의 그 기본은 우리것의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들을 앞으로 펼쳐 보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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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평창아라리가 가장 먼저 채록된것은 1933년도에 김소운의<조선구전 민요집>에 가장 먼저 수록되어 있다.(제일서방 1933)<조선구전민요집>에 수록된 이후, 1960년 영창서관에서 재 발행되었다. 그런데 1960년본에서는 "아리랑 시리랑'이란 구절이 "아리랑
아리랑"으로, 또 "너머"가 "넘어"로 변해있다.(평창아라리 가사집. 평창군. 2005년 발행 P17)
이 가사는 평창아라리중 제일 처음으로 1933년 <조선구전민요집>에 수록된 이후, <조선민요집성/1948>에 5수가 전하며 <한국민요집1/1961>, <태백의 설화/1974>, <대화총람/1976>에 수록되어 있다.
* 강원일보사 발행 <태백의 설화 上>에 축자왕자 →죽자왕자. 아리랑 시리랑 →아리랑 아리랑, 노다가세 → 노다가서. 그외 능수나버들 →능수아 버들로 변해있다.
위 문장에서 단어의 변화는 오타나 오기록이 아닌 당 시대의 단어 변화들로서 음의 변천과정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강원일보사 발행 태백의 설화는 각 군단위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나타내는 책으로 전 5권으로 되어 있으며, 평창군 편은 4권에 수록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면 1933년 진부면에서 가장먼저 채록된 평창아라리 5수중 하나를 이해해 보자.
-----< 평창아라리중 1933년 김소운에 의해 가장 먼저 채록된 가사 >--------------------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
축자왕자는 팔자도 좋아 긔차에다 몸을 실고 안동현 구경
아리랑 시리랑 아라리야 시리랑 고개로 너머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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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리랑의 가사의 뜻은 단순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가사의 뜻도 모르며 정선 아리랑은 이 가사를 풍자편에 분류하고 있다. 그것은 가사의 역사적 해석을 못한 오류로 이 한 줄 가사도 이해하지 못하며 아리랑 이론가들이라고?? 그러면서 정선아리랑에선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구름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는 600여년전 고려충신 전오륜등 죽림7현이 이 노래을 부르며 송도를 향하여 매일 문안인사를 올렸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만들어낸 날조이상의 가치는 없다.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라는 평창아라리 가사의 해석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사 그대로의 이해이다.
1930년대 오대산 박달나무는 검인인 축자(丑)와 왕(王)자의 검인의 도장을 찍어 제천쯤에 싣고나가 기차화물로 안동에 내려가 장신구등으로 가공되는 것으로 공예품등에 사용되었기에 소나무 뗏목보다 더 비싼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역사적 이야기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다시한다.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가 성립되어야 하는데 위의 만수산 아라리가 600여년전 전오륜등이 불렸다는것은 역사적 이해가 불가한 지점이 분명 있는데 아리랑 이론가라 자처하는 자들은 아리랑의 주변, 특히 역사적 소명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아리랑은 가락이기 이전에 민중들의 애환이 담긴 삶의 소리인데, 아리랑 이론가는 외지 사람들로 그 지역들의 향토사에는 밝지 못하고 아리랑의 일반적인 이해밖에는 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박달남근의 가사에 대하여 본인은 아래에서 충분히 이해가는 당시의 역사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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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
아마도 이 가사의 평창아라리는 1920~30년대에 평창지역에 너른 분포에서 가장 많이 애창된듯 하다.
헐버트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오는 날부터 10년간 하루도 아리랑 가락을 안 들어본 날이 없다 하였듯이 당시 구한말부터 아리랑은 전 국민이 애창한 아리랑 중흥기로 이해해 본다면, 이후 일제 강점기에도 아리랑은 그 맥이 이어졌으며 더욱 발전하여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도 자체적 가사를 만들어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아리랑은 그 지역적, 공간성과 시간성이 축약된 가사가 표출되는것이 생명이고 특징인데...( 단, 진도아리랑은 31수의 제한된 가사로 엄격한 음률을 따르는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1931년 박종기가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러한 고정적, 일률적 가사에 의존하는 진도아리랑은 앞으로의 이야기 제외함을 기준으로 한다)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나간다라는 한 줄의 가사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시에 견고한 고급목재의 오대산에 박달나무가 산판되어 축자나 임금왕자의 검인 도장이 찍혀져 다 나간다라는 뜻이다.
당시 오대산에는 소나무보다 박달나무가 많았던듯하며 고급목재로 당연 소나무보다 값도 더 되었슬 것이고 그러기에 산판쟁이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였으리라.
일제강점때인 1930년대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위에 일본인의 벌목회사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곳을 회삿거리라 부른다. 해방 이후에도 월정사 아래엔 260여호가 살았으며 그들 대부분은 산판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잠시 일제강점기의 조선 사회상을 이해힐 필요를 느낀다면..
1910년에 한일 합방을 깃점으로 국가를 좀 먹은 일본은 도적이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반성은 없어서는 아니된다.그들은 조선을 삼키자 우리의 고질병적인 양반사회는 없어졌다.
당시 안동김씨의 외척세도 60년에 민비의 패도정치에 오죽하면 개화세력인 박영효측의 암살계획에 유길준은 그것은 정당치 못하다는 판단에 비밀을 누설시키고 자기네가 암살하려드는 이러한 시국에 사회상은 암흑 그 자체였다.
양반들은 첩질에 힘도빠져 방바닥에 누워 담뱃대만 물고 지내며 노비들의 생사 여탈권도 손에 쥐고 있는것처럼 노비들에게 린치를 가하며 당시 사회상의 둔화와 지저분한 사회에 페스트, 콜레라등의 발진하게되자 ,,, 언젠가 이야기한 우리는 청게천의 냇물에 빨래하는 여인들의 옛사진을 보며 감회하지만 기실 누런 똥물로 외국인 선교사들은,,, 언더우드 부인도 그에 관한 위험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암울하고 비 문화적인 조선에서 구한말 아리랑의 자료로서 한국에 땅을 밟는날부터 10년간 하루도 아리랑을 들어보지 못한 날이 없다고 기록하는 헐버트 선교사도 조선은 차라리 일본 식민지가 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한국사랑이 삐뜰러진 것이 아니라 여러 선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양반, 노예의 구분을 어떻게 떨칠 수 있었슬까??
그러한 강점기 20년대엔 우리나라엔 근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공장들이 세워지며 국민들의 손엔 공업화 제품들이 쥐어지게 된다.
위 아리랑 가사중에 안동현이란 표현이 그것이다.
구한말 경복궁 중수에 필요한 소나무를 강원도에서 공출하여 뗏목으로 운반했다고만 알고 있는데 기실 경복궁 주변의 팔판동, 내자동, 효자동, 남산골의 양반집들은 전부 소나무가 팔요한 상태이고 그 골목들을 지나며 보면 얼마나 많은 소나무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 중기엔 치악산 황장송을 궁월 목재로 사용하였지만 더 많은 수요의 나무는 한강의 뗏목을 이용하는 태백산 산간의 나무가 이동되었다. 그래서 1920년대엔 월정사 위에 산판의 벌목공들이 많아지고 일제는 그곳에 목재회사를 만들어서 이후 1970년대 오대산 국립공원이 지정되면서 회삿거리의 많은 주민은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6,25전에는 약 260여호의 인부가 있었다 하며 1,4후퇴시 워커 주한 미 사령관과 김백일 장군의 명령에 군인들은 반발하였지만 이 벌목공 인부들중에 3명이 월정사 당우 21채를 모두 전소시킨다.
물론 당시의 월정사 사정은 50년 6,25이전에 이미 49년에 북괴 무장공비가 월정사를 거점으로 제 1병단을 형성하였기에 9,28 수복시 인천상륙작전으로 아군이 인천시내를 진압해보니 시내 복판에 있는 해광사라는 절이 북괴군의 소굴로 변해 있었기에 워커장군은 오대산이 제 1병단의 무장공비들과 연계를 염려하였던듯 하고 민간인은 북괴군의 부역을 담당하고 후일 부역자로 몰려 죽는 우를 범하기에 미연에 방지를 위하여 월정사를 전소시킨듯 하다.
아리랑의 가사 박달남근은,,, 1933년 김소운에 의하여 채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때 당 시대에 이 지역 (진부)에서 가장 많이 불리우던 아리랑이였던듯 하며. 그 뜻은 박달나무는 축자 왕자의 일등 품질의 도장을 찍고 당시 구경도 못해본 기차를 타고 안동까지 (출발지는 제천쯤에서) 간다는 서술적 가사의 노래이지 유모와 해학의 장르에 끼여 있어야 할 가사는 아니란 점이다.
아마 20년대엔 우리나라에도 기차와 신작로라는 도로와 경공업이 발달되며 전국 각지에 초등 보통학교들이 설립되어 일본어를 배우게 되지만 아이러니 한 점은 구한말보다 더욱 한글이 보편화되어 누구나 한글을 알고 익혔던 점이라...
이 당시 안동지방에선 목재가공업이 발달되었던듯 하다. 라이터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주머니 속엔 항시 가지고 다니던 성냥의 산업도 안동지방이었던듯 하다.
그래서 축자 왕자 찍으면 아마 소나무보다 더 비싼듯하며 다 팔려나간다는 뜻이라..
단군의 단자는 박달나무 단(檀)자로 박달나무는 단단하고 우리민족의 상징적 나무였던듯하며 단군 도읍지는 아마도 박달나무 집단 서식지였던듯 하다. 이러한 박달나무가 오대산에 많이 자생하였는데 이 시기에 전부 벌목하여 지금은 오대산에 박달나무가 없는듯 유감이다.
또한 오대산의 회사거리는 7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붐볐으나 국립공원이 되며 국립공원 밖으로 철수되었다. 구한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에 그들의 생업은 산판이며 박달나무외 소나무(이 고장 용어로는 강송이라 한다. 물론 춘향목이 고급송이라는등 해봐야 우리나라 소나무들은 한 품종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계,문, 강, 목, 과, 속, 종의 마지막 종의 종자를 이야기할때 한 종자라는 것이다)
평창일대의 곧고 쭉쭉뻗은 강송을 벌목하여 오대천엔 뗏목이 아닌 등걸로 떠내려 보내 조양강 입구의 나전쯤에서 뗏목으로 묶어 한강을 내려간 것이라야 이야기는 맞아 들어갈 듯 하다.
기실 정선 아리랑이 아우지지에 뗏목을 떠 내려보내는 뗏꾼 아리랑도 한몫한다.
이 뗏목은 사북의 핀 꼬까리와 어라연으로 내려가는 황새여울,,, 한 해에도 몇명씩 죽어가며 계곡을 넘어야 했던 과거 뗏꾼들의 삶의 애환을 그리는 뗏목 아리랑의 시발로 아우라지보다 월정사에서부터 조양강으로 흐르는 한강 지류천인 오대천에 더 많은 벌목 소나무를 내려 보냈어야 할 것같다.
그것은 지도를 보면 가리왕산, 중왕산, 백석산, 잠두산, 두타산,에서 비로봉까지 오대천은 이러한 해발 1,200이상의 산을 끼고 돌아 흐르기에 일제강점기에 월정사 위에 벌목회사를 두고 벌못공이 260여호에 이른 것이라 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대산의 진부에서 벌목아라리의 하나인 月精五臺山 박달낭근 축자왕자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가 불리워 진 것이다.
여기서 다나간다가 아니라 다 나간다라고 띄어쓰기를 해야 정확한 문법이고 이해가 빠른 것인데 모든 문장엔 이 가사의 이해를 모르는 탓에 붙여쓰기의 오류를 범한다.
이 가사가 평창아리랑중에 가장 먼저인 1933년에 채집된 가사로 당시 산업화 사회로 박달나무는 최 고급 목재로 안동에 내려가서 공예품이 되는데 그러기에 당시에 오대산 일대에서는 소나무보다 더 효자나무인 것이다. 그래서 이 가사는 당시의 사회상을 나타내는 것이지
해학적 가사가 아니란 점이다.
이런게 아리랑의 접근이고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삶의 혼이기에 정선의 이론자들처럼 아리랑 가사의 음률로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역사적 소양을 가지고 이해하여야 한다.
또한, 이 가사의 두번째 음절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고개서 노다가세하는 가사는 후렴부를 대신하여 본 음절에서 후렴부가 도입되었다.
우선 후렴은 무엇인가??
서양음악에서 후렴은 refrain과는 달리 아라리에서는 addition 소리라고 아리랑 연구자들은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론도 있지만 그런 논리는 전혀 맞지 않고 단어적 특색만 구사한 것이다.
아리랑의 후렴이 부가적 설명의 이해인가 하면 단 한줄의 아리랑 가사만 놓고볼때는 후렴이 부가적으로 아리랑을 이해시키지만 그보다 후렴의 반복적 사용에 후렴의 기능은 리플랙스적이라야 옳은 것이다.
이것은 타 음악이나 서양음악의 후렴은 반복적이고 아리랑의 후렴은 부가적이라면 논리 자체의 형평도 없다. 그러기에 어떠한 노래들도 후렴은 부가적이고 반복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평창아라리는 후렴이 없다. 그것은 평창아리랑뿐만 아니라 과거 정선 아라리도 평창아라리롸 동일한 태백의 영서의 아라리로 이런 지역적인 지금 이론자라 떠는는 자들의 편협적 사고가 아닌 영, 평, 정 아리랑은 동일 공간에 동일 시간성의 아리랑으로 후렴이 없었다.
여기서 확장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런 추상적인 모호한 단어는 의미가 없다.
평창아라리는 지금도 후렴이 없다.
과거 태백산간의 영서지방(평창, 정선, 영월)의 아리랑이 후렴이 쇠퇴하였는지 아니면 후렴이 발생되지 않았는지 모호하고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는 다음 글에서 다루어 보기로 한다.
다음글에서 1940년대에 재즈 발굴로 유명한 미국의 민요학자 로맥스 父子의의한 민요의 기능성 문제에서 유래된듯한 표현의 산의 아라리인 평창아리랑엔 왜 후렴이 없슬까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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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아라리 가사집>은 2005년 평창군 문화관광과 주관으로 이 고장의 전통민요 평창아리랑을 광법위하게 채록하여 집대성란 책으로 평창아라리 1,500여수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상편엔 아래의 이런 글이 실려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의 후렴에서 아라리야는 정선지방의 영향에서 온 것인 듯하며 지역적으로 인접하여 있는 관계로 가락에도 독자성을 별로 찾아볼 수 없으며 본 고장에서는 가사와 가락을 아는이도 별로 없다라고 두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평창아리리 가사집> p18.
그러나 정선 아리랑도 시간과 공간이 평창아라리와 동일하며 과거에 정성아리랑도 평창아리랑처럼 후렴이 없다가 근자에 붙게 되는것이다.
그러기에 평창아라리의 후렴은 정선지방에서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는 이치에도 맞지않는 논리로 편저자인 정장룡(강릉대 교수. 문학박사)는 이 책을 편집하였을 뿐 평창아리랑의 이론적 학설도 아닌 책에서, 아리랑 학자도 아니면서 고집광적인 자기의 논리를 실었다. 그러기에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선입관적인 지식의 편협적인 상태로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고 보아야 옳다
왜냐하면, 첫째 영서지방의 메나리토리권역대의 아라리의 공간적, 시간적 동일성에서 각 지역적 문화의 특수성의 차이로 보아야 할것인데 평창과 정선이란 구분을 하였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평창과 정선 아라리의 차별적인 거리감이 생겼지만,, 정선 아리랑의 김연갑이 주창하는 아리랑의 郡단위적 성격의 구분은 구한말 시기엔 그러한 郡단위적인 성격은 없었기에 이러한 설은 옳치못한 이야기일뿐이다.
가령, 구한말 정선 아라리가 유행했다면 지금의 정선군 신동면은 그 시절엔 평창군 동면이었다. 그러기에 아우라지를 내려온 땟목은 신동 앞 된 꼬까리 여울의 죽음의 곡예를 하고 영월 어라연으로 내려가는데...
정선 뗏목 아라리의 핵심인 된꼬까리가 그 시절엔 평창땅이라 뗏목아라리는 정선이 아닌 평창땅이라 평창아라리라야 맞는가??
정선 아리랑은 이러한 맞지도 않고 필요도 없는 假 논리위에 假논리를 첨가하는 이상한 假設의 집대성이다.
그러기에 위의 책 역음 편자 두 저자와 또 한 사람 정선아라리에 이론가를 자처하는 김연갑의 郡단위 아리랑의 지역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이론도 아닌 참으로 웃기는 발상이다.
또한 김연갑의 웃기는 발상은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만수산 검은구름이"" 라는 아라리가 아리랑의 현존 가장 시원이라 하는데... 그것이 역사적 기록이 있는가??
나의 그에 관한 글을 보시면 그 잘못을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kkks1/835 < "만수산 검은구름~ "아라리 가사는 정선 아라리가 아니라 평창아라랑이다)
또한 아라리 아라리야는 정선지방의 영향을 받았다 하는데 이도 맞지않는 논리모순이다. 정선아리랑(김연갑 저)이라는 3만냥짜리 책을 보면 그 중엔 두마디 이야기가 있다.
그 하나가 정선 부군수였던 연규한 씨가 하는 말로 정선 아리랑은 원레 후렴이 없다가 최근(70년대쯤)에 후렴이 붙여지며 아직도 후렴없이 부르곤 한다고 지적 한다. 돌림노래로 함께 부를때 다음 사람이 미쳐 가사를 선정하지 못하였슬때도 후렴으로 시간을 메꿔 준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위 평창아리랑 책의 두 엮음저자는 자기의 주관적 해석의 책도 아닌데 평창아라리에 후렴이 붙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는 인접 정선아라리의 후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들의 정선 아리랑도 이 시기엔 후렴이 없었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이런 엉터리 논리를 평창아라리에 각색하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이 책이 위 두 엮음저자는 그 한문장의 오류라기보다는 평창아라리 가사집 전반부에 정선 아라리가 평창아라리보다느 상위라는 입장을 표현하는 맹목적 선입관을 견지하고 있기에 어느 한 부분 모순이라 표현보다는 이 책 전부에 편견적 견해의 오류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김연갑의 정선 아리랑 책에서 연규한씨에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드네"란 가사가 고려말 전오륜외 죽림칠현이 부른 가사로 이보다 더 앞서는 아리랑 가사는 없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는데 연규한씨의 답이 없자 그럼 이 가사가 600여년된 최고 상한대의 가사로 봐야지요라고 한다.
연씨가 기라면 그대로 인정되고 아니라면 아닌것인가?? 웃기는 발상도,,,연규한씨가 역사에서 정답을 내릴 수 있는것인가??
정선 아리랑 사무총장이라는 김연갑은 아리랑에 관하여 자기의 논지를 필하고 그 안건이 어떠한 학계나 사료 검증도 없이 누구도 터치하지 않는데, 후일 그것을 자기가 인용하여 쓰면 그것이 이론으로 정립되는듯 ... 사실 모든 아리랑의 제 이론들은 그들이 학자도 아니고 타당성의 검증도 없는 이론도 아닌 이야기들뿐이랴.
나는 그래서 김연갑의 3만냥짜리 정선 아리랑책은 더 이상 볼게 없어 차라리 고철장수가 득이라 생각하고 집어던졌다.
또 하나 그의 책 <아리랑의 시원을 찾아서>도 보고있는데 그의 책을 보는것은 무엇을 득하자는게 아니라 그들이(정선이)무엇을 거짓말 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이 아리랑 시원책에 절반은 전오륜의 외삼촌인 이색이 오대산에 은거하여 아라리 비슷한 시조를 짓는 논제에 할애하며, 이색의 시조에 만수산 아라리 가사를 접목하려는 생각뿐,,,
하지만 본인은 이 가사는 전오륜이 부른게 아니라 궁휼한 봄철 화전민들이 청옥산에 올라 나물뜯을때의 가사란 점이다.
이렇게 평창아라리(아리랑)의 제 이론을 이야기하려면 이들을 정선아리랑이 편취하여 오류적 해석을 하고잇기에 평창아리랑의 이론적 확립을 위헤서는 정선아리랑의 엉터리 이론을 파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선 아리랑의 이론의 과욕적 오류를 몇개 열거해본다면....
* 정선교육청의 악생들에게 가르치는 학습지도자료엔...
아리랑은 정선에서 시작되어 한쪽은 부산으로 한가닥은 평창을 거쳐 서울로등,,,우리나라의 모든 아리랑의 기원은 정선아리랑이라는
홍교장의 김일성식 억지 세뇌적 주입식으로 아리랑 기원설을 가르친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드네"란 아리랑 가사가 600년전 고려말 충신이 부르던 현존 최고 오래된
아라리 기원설이라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목은이 오대산 은거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런 주장은 당시 조선 개국시의 역사도 모르는, 또한 아리랑의 제 규격도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이 부분에 본인은 그들의 기원설 주장이 오류라는 이론적 이해의 글을 참조 바랍니다.
* 미탄에 한치뒷산(청옥산) 아라리가 현존 남아있는 아리랑의 최고 보고이다.
이 이야기에 정선은 한치는 정선땅이라고 주장한다,,,물론 정선에도 한치는 있다..
평창의 寒峙는 성마령에서 정선 너머가는 고개를 뜻하고 정선에서 부르는 汗峙는 정선 남면 유평리에 있는 작은 고개를 말함이니 정선한치는 조금 앞 뒤가 맞지않습니다 (너브산장님의 참조글)
미탄의 한치 뒷산엔 곤드레 딲죽이가 지천으로 화전민들이 춘궁기에 나물로 연명하며 삶의 고통을 표출하는 나물뜯는 아리랑을 부르는 데.. 정선 남면의 한치엔,,,과거 석탄도 아닌 광물 광업소가 있었듯이 산엔 봄나물 하나도 나지않는 곳이다.
그리고도 한치뒷산에 봄나물 타령을 이야기 할 것인가??
*평창아라리는 지금까지도 메나리조 산의 아라리라 표현하고 있다.산의 아라리란 기능성의 이야기로 알랜 로맥스의 구분에 의한 것이라면 정선 아라리는 산의 아라리라 표현할 수 있는가?? 즉, 후렴을 달며 변모하는 과정상에서 삶의 표현을 왜곡시킨 점이란 뜻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충분히 해석하겠습니다
이렇게 정선 아리랑은 왜곡된 이론의 발판위에 서 잇다,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이론적 속임수를 걷어치워야 평창아리랑의 제 논리를 입증할 수 있기에....
과거 인터넷 발달 이전의 시간대에 강원대의 정선 아리랑 학회가 그 이론적 지지자 역활을 했슬텐데 그들의 기록은 문헌으로나 찾아봐야 할 듯 하지만,,, 그것은 오늘의 정선아리랑의 토양이란 점인데..그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박만일 박사의 아리랑론은 재고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슬 것이고, 더 나아가서 조용호 박사의 아리랑 제 이론,,,진부한듯한 이론들이지만 그것은 아리랑의 구조적 문제일텐데그 많은 논리에서도 단 한줄도 아직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럼 아리랑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사람들은 아리랑의 뜻을 캐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없는 이야기이고 또한 어느 누가 그 뜻을 밝힌다고 해 봐야 그것은 아리랑의 부분적 이야기이지 아리랑 전체를 아우룰수 있는 진부분 집합의 요소는 아닌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점들,,,일반적인 아리랑의 개요와 나아가서 평창아리랑은 아리랑중 유일하게 후렴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랑이란 장르의 역사의 이야기에 정답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유에 근접하고 타당성을 가지는 이야기를 그려 보겠다.
이렇게 한발 한발 부분적으로 평창아라리(아리랑)의 제 이론을 확립해 나갈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민족과 아리랑.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기록에 공허한 점은 무엇인가??
그 많은 사람들의 아리랑 이해의 접근방식이 나의 눈에는 이상하다는 생각까지도 필하겠습니다.
또한, 요즘은 재즈 아리랑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다는데, 물론 좋은 의미이나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서양화풍이기에 우리것의 세계화란 차원으로만 고집하면 어패가 다가올 것이다. 세계화의 그 기본은 우리것의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들을 앞으로 펼쳐 보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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