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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이런일도 있었다.(임진왜란시 의병장의 형행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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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6-07 00:27 조회4,42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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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시 의병장의 형행사건...)

 후세백작

 "의병의 날을 잘 기억하자"
감사히 잘 읽어 봅니다.
국난의 어려운 시기에 목숨을 걸고 국가를 위하는 의병들은 시대를 넘어서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임란당시인 420여년전 평창에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임란전 횡성 세족인(*주; 제주고씨 화전군파 )의 고광후는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영월로 이사하였는데, 임란을 겪으며 그의 형제들은 모두들 왜구에 대항하자는 고경명의 "창의격문"을 읽고 뜻을 같이하며 분연히 일어나 셋째인 "종경"은 영월과 그의 고향 횡성등지에 알리어 의병을 모집하니 마을사람들은 종경의 문무재주를 추앙하여 그를따라 의병에 참가하여 고향을 지키겠다는 향병(鄕兵)이 수백명이 되었다.
 
장차 홍천과 영춘 사이의 험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왜군의 진로를 차단할 준비를 하고 있슬 때였는데 유영길 강원도백(도지사)가 찾아와 종경이의 의(義)가 가상타고 격려하며, 당시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이 남한강을 건너 강원도로 넘어오리란 예상에 의병 500명에 새로 모집한 500명의 영군(營軍) 첨하여 1,000명의 군사로 흥원진(興原陳)을 (*주-남한강의 원주 흥업쯤의 한강나루 군사 진영) 도우라고 지시하였는바, 고종경은 명령대로 군사를 통솔하여 흥원진으로 가는도중 영군의 도망이 심하고 흩어지는 바람에 이를 추포하느라 기일을 어기게 되어 때를 놓치게 되었다.
 
강원도백은 이에대한 책임을 물어 그를 체포하여 평창군으로 이감시켜 권두문 평창군수로 하여금 형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당시의 상황과 정세를 고려해본다면 강원도의 군사들은 조정의 명에따라 탄금벌의 신립장군 휘하에 배속되고, 도백이 지원해준 새로 모집한 영군은 정예부대가 아닌 노비나 하층계급의 군역을 탐당할 자연인들이 것이었으며, 당시 상황으로는 탄금벌의 신립장군(현 육군참모총장)의 조정의 군사는 대패하고 흥원나루는 귀래-목계로 이어지는 남한강 길을 따라 50여리 위치하기에 아마도 한양으로 오르는 왜군이 남한강 흥원나루 건너의 앙성면 (용포)쯤에 진을 치고 있었슬듯 한데, 지척에서 조선 최정예 부대가 대패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슬듯, 그들도 사람인지라 왜군과 상대가 안 된다는 생각에 도망을 치는듯하다.

여기서, 이미 고종경은 이들을 통솔하는 의병장 역활을 하였으며, 또한 그를 체포하여 평창으로 이송된 점은 당시의 영월은 현으로 현은 군아래의 행정체계이며 현감은 형행의 자격이 없었던듯, 영월현의 차 상급 명령자인 평창군수로 하여금 그를 형행하도록 명령하여 평창으로 압송되었던 것이다.

 이때 평창에 피난 온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부사(前俯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申卿澄) 교관(敎官) 홍식(洪湜)등이 창의(倡義) 인재임을 들어 가위(可謂) 쓸만한 인물이니 석방을 하여 국가에 이롭게 함이 옳다" 하니 권군수는 사죄성공케 하려고 힘썼으며,그 뜻을 사죄공문(赦罪公文)으로 원주 감영(監營)에 보냈으나 전령자가 가는 길에 몸져누워 사흘을 허비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권 군수는 상사의 명을 지연시킬 수 없다 하여 행형을 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과 횡성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형행날에는 평창에 찾아와 “위급존망의 날을 당하여 무죄한 의사(義士)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사면을 요청했고, 사형을 집행한지 얼마 않되어 도백은 종경에대한 형을 정지하고 무죄석방하라는 첩문(牒文)이 내려왔지만 이미 형은 집행된지라, 애석하기 짝이 없다.
후일에 조정에서 명령전도(命令顚到)의 책임을 물어 도백은 파출(罷黜)되었다.

그리하여 고종경, 그는 임란당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창의(倡義)를 한 미완의 의병장으로 분명 의병장 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해야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후세백작인 저의 13대 선조의 이야기로 저로인하여 세상에 소개되는 이야기 입니다.
tp:blog.daum.net/kkks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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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영월 노리곡(현 진벌리)의 고씨굴 이야기 유래

영월 노리곡(현, 진별리)의 고씨동굴은 그곳 안내판이나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그저 임진왜란때 고씨일가가 피난하여 고씨굴이라 부른다 라고만 알뿐이다. 그렇다면 임란때 조선팔도의 모든 사람들이 피난다녔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고씨일가는 왜 그 동굴로 피난하였는지 그 이유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월의 모든 역사 이야기들에서는 그저 고씨 일가가 피난하여 고씨굴이라 부른다는 이야기만 있슬뿐이다.
김삿갓 묘를 발굴하여 김삿갓 면으로까지 확장하는 영월인들,,,그 발굴자 박영규 당시 문화원장같은 창의성은 보이지 않는 영월인듯,,고씨굴로 피난가기까지에 임란당시 의병을 일으킨 집안이라 할 수 없이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피난가야 했다는 절박한 상황 묘사는 없다.

(*김삿갓 묘를 1982년 박영규 영월문화원장이 이곳을 소개하여 학계에 인정을 받아 김삿갓 묘라 한다. 하지만 그의 둘째아들 익균은 평창읍 천동리에서 살며 훈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그의 묘는 천동리에서 영월 북면 도마치로 가는 입구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와 비슷한 형태의 묘가 그 위에 있었다 한다. 그것이 난고 김삿갓의 묘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왜냐면 첫째아들은 김삿갓의 형에게 양자로 가고 둘째 익균은 안동김씨 가문이라 유교적 문화로 예를 중시한듯 하고, 아버지 시신을 거두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화순에서 시신을 거두어 영월에 묻었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기록은 아닌 다만 추정치일 뿐이다.

 좀더 자세히 이해하여 본다면 조부 선천 방어사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항복한 대역죄로 사형당하자 그의 부하 김성수가 병하, 병연, 병호 삼형제를 피신시켜 위 두형제에게 한문을 가르치는등 하였다.

당시로서는 조부가 사형이후에 멸문지화의 화를 걱정하였기 때문인데 다행이 멸족으로 확대되지는 않았고 폐족이 되어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자 반역죄의 가문이라 어머니는 삼형제를 데리고 여주, 가평등지에서 더 깊숙한 평창 미탄에까지 이주하였고 영월 삼옥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서 병연은 영월읍내 백일장에 장원급제하는데,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을 받아 본 그는 시상을 가다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
그는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스토리에서 영월읍내는 크지도 않은 마을에 백일장이 열렷는가 하는 의문부터 확인해야 할 사항이고, 또한 조부가 사형당할때 병연의 나이는 여섯살, 위의 형 병하의 나이는 여덟살이라 최소한 조부의 사건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으리란 점이다.

그리고 병연의 아들중에 맏이 병하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갔고, 둘째 익군이 가장으로 그는 평창 천동리에서 도마치로 가는 초입에 살았다 한다.
 그렇다면은 익균이 전라도 화순에서 아버지 시신을 거두어 올때 그는 영월에 거주한 것이 아니고, 영월의 어릴적 집은 폐가가 되었슬 터인즉, 그 집옆에 아버지 묘를 쓴다는 점도 어패이리란 점이다.
혹,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셔서 묘를 쓴것 아닌가 하는 가상도,,
 
아마도 김삿갓의 아들은 유교적 예를 중시하여 안동김씨중에도 스스로도 장동 김씨라하는 세도가문이라 아버지 묘의 관리를 위해 그의 생활권에 가까운 곳에 묻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익균은 죽어 아버지 곁에 묻힌것은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익균의 묘는 천동리 고, 강병준씨의 집터 근처이고 "80년대 이후 언제인지 이장하였다 하는데 그 위의 묘도 같이 이장을 했다면 혹시나 그들의 문중 선영에 난고의 묘가 있슬지도 모겠다는 가상도 하여 봅니다)
 
아예 좀더 한다면 병연 형제는 멸족이 되지않고 폐족이 되어 황해도 곡산에서 여주,가평등지로 돌아다니다가 고단한 삶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남의 눈을 피하여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평창에서 미탄에서 깊은 산골인 영월 삼목리로 이사하였는데 당시 영월은 큰 동리가 아니고 군 소재지도 아닌 현으로 백일장이 열릴만한 인원이 못 되었슬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영월은 고씨동굴에 대한 역사 이야기를 다시 정비하여야 한다.
위에 이야기한 고광후의 아들 3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대항할 것을 구체화 하고 이를 실행을 한 것이다. 다만 강원 감사의 바람직하지 못한 명령과 이를 이행 못했다고 형횡을 하달하여 고종경은 평창으로 압송되어 사형당하는 미완의 의병장이 되었고, 평창을 지나 영월로 들어서는 왜구들에 그의 가족들은 목숨을 보존하려 진벌리 고씨동굴로 숨어 들어갔다.

왜구들은 이 동네 주민들에게 수색하여 의병을 일으킨 고씨 일가를 찾았는데, 그때 밀고자에 의해 굴에 있는 것을 알고 입구에서 연기를 들여보네 종원, 종길 형제가 포로가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 조씨부인은 굴내 샘물에 떨어져 자결 하였다.

이제 420여년이 지난 지금엔 사람들은 강을 가로 지르는 멋진 다리를 놓고 고씨굴을 유람하며 그저 고씨 일가가 임란때 피난하였다고만 글들을 쓴다.

 하지만, 이제라도 영월군은 그의 역사의 편저에 고씨동굴의 절규스럽고 슬픈 내용의 이야기로 다시 다시금 수정하여 명시하여야 마땅하다. 이제 이 역사를 알고서도 수정을 안 한다면 그도 역사의 배임이고 능욕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완으로 그친 고종경 의병장의 의연한 죽음은 당 국가는 존망하였기에 이제는 지역사회에서 그 부음에 대한 제를 지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조씨부인의 순절에 이도 강원도백의 여하 잘못에 기인한 것이기에 진혼제라도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월 후대시민들이 해야할 책무이기도 하고 또한 조국의 부름에 분연히 일어선 의병장 고종경은 후대의 영월인의 귀범이 되며 또한 영월의 기상을 높이는 자랑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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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당시 평창 주변의 상황들,,,

임란당시 일본의 조선정벌군은 요즘말로하면 시드배정을 하고 침략하였다.
강원도를 정벌하는 왜군은 규수의 사스마현(현 가고시마)의 "시마즈 가문"은 센코쿠(전국시대) 말기 큐수의 다른 다이묘들을 거의 제압하여, 토요토미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대신 사스마번을 보장받게 된다.또한 4번대의 총대장 모리요시나리는 나가사키 윗쪽의 시마즈 가문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부젠국의 다이묘가 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며 그는 자기의 병력 2,000명에, 사마즈 번의 병사 14,000명을 지휘하며 강원도를 정복할 임무를 가지고 침략하였다.
 
이러한 요즘말로 먼 변방의 전라도라,, 그들은 충성심을 표시나 내듯 코와 귀를 베어갔던 가장 악명높은 군대이다.
이 악명은 2차 정유재란때 전라도 지방에서 자행한 것이며 그의 군대 14,000명도 처음엔 4,000명인듯하다.
그것은 왜구가 평창- 영월을 빠저 영원상선 전투에 약 4,000명이 공격한 것으로 드러나고 호구록에 의하면 권 군수는 4일정도 미탄에서 평창으로 집결하였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만약 14,000명이라면 4일에 걸처서는 무리일 것이다.
 소서행장이 행주산성 공격시 12명의 장수들은 모든 방향에서 처 들어오는데 고니시 유키가와(소서행장)은 현 지축 기지창쯤에서 노란 차양의 파라솔아래 작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호구록의 기록에 의하면 신림쯤에서 원주로 향할때 왜구들은 한줄로 갔으며 그중 대장은( 모리 요시나리란 표현은 없슴) 단 졸개의 복장으로 가끔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한다.
이러한 차이를 볼떼 임란 초기엔 4,000명의 왜구들이 강원도를 짓밟았슬 것이다.

시마즈 가문의 4번대, 그들은 조선정벌 주공 루트인 부산- 문경새제- 한양길에서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우회전하며 김화-통천- 화천- 춘천-고성- 삼척-정선- 평창-영월-신림을 지나 강원도영 원주로 강원도를 한바퀴 우회하며 주변의 가지치rl를 하고 정공법으로 강원도영을 침략하였다.

 그러므로 강원도백의 우려의 흥원진으로 남환강을 건너 들어오리란 예상은 적중하지 못했으며. 모리의 4번대가 원주강원강영 입성시 원주목사(시장) 김제갑옹은 이미 영원상성(치악산)으로 4,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잠적한 상태이다.
강원도영도 이미 조정의 명에 의해 대부분의 군졸들을 탄금대 전투에 대하여 차출되었으며, 4,000의 병력은 잡졸들 뿐이었슬 것이다.

왜군은 원주에 군사들이 없자 민간인을 다그쳐 원주시장이 이끄는 부대가 영원산성에 잠적했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음날 영원산성에(치악산)올라 원주시장 김제갑옹과 그의 아들의 목을 베고 영원산성 전투는 무의미하게 끝나는데 이것은 내국인들의 첩자가 시장을 파악하여준 결과 쉽게 찾아 죽였기 때문이다.

 임란 당시 권군수가 겪은 사실들을 바로 일기로 쓴 보름간의 행적에서 우리는 임란의 평창전사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 가령 예를들어 노산(노성산)에서 결전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나 여만리 강변의 뙤담을 왜군이 쌓았다는 이야기들은 정사가 아닌 것이다.

 응암리의 굴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지만 이 응암을 매화라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매화낙지형의 지형때문이기도 하다. 응암굴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이곳이 매화낙지형이라고 하는 말이 쉽게 이해가 간다. 그리고 옛날 우리의 지형엔 역학적, 풍수적 이치의 이름이 많이 붙었다.

그런데 매화리라 하는것을 응암굴에 피난한 권군수가 상대굴(관굴)과 하대굴(민굴)과 매를 이용하여 서로 교신하였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권군수의 "호구록'에서 평창에 왜군이 들어오고 응암굴로 피난가는 상황에 매를 이용할 사유도 없었고, 그러할 시간도 없었다.또한 이곳에서 매를 기르고 피난을 대비하였다, 하지만 실은 피난길에 동촌(미탄)으로 가는 안과 응암굴로 가는 두 안에서 채택된 것이고 서둘러 응암굴로 가가 되는 것이지 음암굴에 전투 준비를 한 적은 기록에 없다.
그래서 매의 화를 입어 매화리라 하는 것은 하룻밤에 들려줄 수 있는 야사일 뿐이다.

이 이유의 논리는 평창의 문화재중 "판관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판관대는 신 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했다는 곳으로, 율곡의 고향은 이곳 판관대인데 고향이 아니라 잉태지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대 언젠가에 사람들이 율곡의 자기집을 잉태지라 표현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율곡이 9선장원에 오죽헌이 출생지라고 하니 이곳 고향에선 그에 비교되는 잉태지로 표현하진 않았냐 하는 추정으로 본다면..
평창군지등에 이에관한 이야기가 마치 설화처럼 감상적인 표현으로 심화되어감을 볼수있다.

역사는 검증되고 고증된 정확한 이야기만 역사로 기록해야 한다.
판관대의 이야기는 오히려 그러므로서 잉태지라고만 한다면 율곡은 고향을 상실한 역사를 가지는 것이다. 그 이유를 그려 보이겠습니다
이점 다음 평창역사에 오류들에서 자세하게 밝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김삿갓에 관한 의문점 >

그는 16세에 영월 백일장에서 장원화고 그날로 어머니에게서 조부 김익순의 선천방어사 이야기를 듣고 집을 나간다,
그리고 일차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방랑의 길로 가는데
그럼 그는 16세에 이미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아들은 병연의 형에게 양자를 주었으며 둘째가 가문을 잇고 그는 평창 천동리 입구의 영월군 북면 도마치에 살았으며
그곳에 무덤이 잇다가 아마 '90년대 이후 어디론가 이장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익균의 묘 위에 비슷한 무덤이 한기 있었다는데 그 묘도 이장이 되고 지금은 없다면 그것은 누구의 묘일까??
이런일이 있다면 문중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를 양자로 주기엔 당 시기엔 의학관계로 둘째도 최소 두어살쯤 되어 잘 자라야 한다.
그러면 첫째가 4-5살때 이후에 양자를 주었슬텐데...
김삿갓은 방랑중일텐데...아버지가 없이도 가능한가??

당시 사회에서 호패가 있어야 과거도 보는데 대역죄인의 자손은 어느 시험이건 응시할 수 없다.
그가 영월 백일장에 응시코져 양반인지 노예인지 무엇으로 확인시켰슬까?? 분명한것은 그에겐 양반의 호패는 없다.
그러기에 이는 역사를 위반하는 역사이야기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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