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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지를 돌아본 나의 사유적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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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10-01 14:04 조회4,4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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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읍 하리 청동기 유적지를 돌아본 나의 사유적 사색]

후세백작 2016.09.27 16:19
이 표지판 아랫줄이 " 이 사업은 복권기금의 지원을 받은 사업입니다"의 이러한 문구가 나의 시선을 자극한다.
하지만, 문화재 공사는 문화재 2급 기사 자격증만 올려 놓으면 일반 공사의 10배이상의 공사비로 산정된다.

월정사 8각9층 석탑이 국보라 그 난간석 공사도 문화재 공사비로 산정되기에 탑을 가려도 크기가 큰 2층 난간석은
그만큼 공사비도 10 곱하기로 커지는 것이다

 그것도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심의가 통과되야 하는 것인데. 해인사 뒷마당에 조그만 3층 석탑의 난간석을 그냥
그대로 베낀 것이다(월정사 중창 공사의 허구란 글에 있다)
문화재는 지적 소유권이 없는지 몰라도 부피가 클수록 공사비는 10곱으로 산정될 것이고...또한, 얼마전엔 평창강
정비사업에 예산 확정이 되었다는데, 중앙부처에서 평창의 어느 후배가 최종싸인을 하였다.
그도 평창인이라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리라.
그보다 20여년전 예술회관 건립엔 자금이 2-300억인데, 이를 배당받는 알려지지않은 노력의 일화도 있듯이, 이번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을 문화재로 지역 유치엔 지역주민들이 이 많은 예산을 감당이란 차원보다는 평창인들의
의지가 첫째인 것이다.

<사진 참조>
평창 하리 청동기유물 발굴현장으로 왼쪽 위의 청색 포장을 들추니 호박돌 축벽의 매장지가 있으며, 그 위에 두께
 8센티 이상의 연마된듯한 민무늬의 편마암이 상판을 덮고 있었다
도굴을 하는 호리꾼들은 古무덤등을 찌르고 다니며 도굴을 하지만,,, 분명히 명당같은 산세라면 봉분이 없는데도
찔러보고 도굴해 버리는데, 이곳은 명당론 이전의 너무 오래된 고 무덤이라 골동품이 없다고 살아남는게 아니라
행여 상판이 덮고있어 호리꾼이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보호막에 유골이 지금껏 보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굴현장의 학예사의 말을 빌면 석실위의 판돌을 크레인으로 들고 처음엔 유골이 하얀색이었는데, 공기중에 나오며
금방 검게 변하며 환골이 되더란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혼돈스러웠던게 환골탈퇴란 묘에 물이 들거나 습기등이 차서 뼈가 녹고 오래 고여서
검은색으로 변한것을 통풍이 잘되고 건조한 곳에 놓아두면 검은 뼈에 기포처럼 성애가 끼듯 점차 하얀색으로 변하는
것을 환골탈퇴라 하는데 위의 하얀색이 검게 변한다고 환골일까??

한문의 의미나 사전적인 뜻으로는 그것도 환골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역환골이라 생각한다.
즉, 석실에서 두개골서부터 다리까지 전신의 뼈가 2,5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하얗게, 그리고 비파형 청동검도
부식되지 않고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었는데 이 하얀 뼈가 밖으로 나와 햇볕을 보자 곧바로 검은 색으로 변한것은
그 석실이 천하의 명당이란 뜻아니겠는가?

그럼, 과연 명당은 무엇일까?? 여기서 지관적인 명당론이 아닌 합리적 명당에 잠시 접근해보면,,,
옛날에 들은 이야기로 나의 먼 집안사람들이 조상 묘에 불만이 있어 이장을 결심하고 묘를 파는데 하연 김이 휙하며
빠져 올라왔다 한다.
앗차, 이곳이 명당이로구나 하고 재빠르게 틀어막았으나 그 김은 금방 날아가고 허사였다. 그리곤 이제 이 묘는 명당
기운이 다 날라갔다고 아쉬워 했슬것이라...
이러한 이야기에서 그 하얀 김은 신비가 아니라 지하의 찬 온도와 외부의 더운 공기가 만난 결로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날아간들,,, 똑 같은 값이 아니겠는가??

 산세의 지층은 암반들이라,,, 용이 내려오고 하지만 그 단단한 암반속으로 용은 커녕 氣도 않 통할듯하지 않는가??
온도에 영향을 받지않는 이 암반속에서 찬 온도를 만들며 (우리나라 온도는 여름30도 겨울 영하 20도의) 50도 차이의
온도에도 영향받지 않을 냉장고같은 깊이 즉 천광시에 세자 두치니 혹은 닷자를 파 내려가는 의미는 적당한 냉장으로
차가워서 얼어있지 않은, 그리고는 시신은 뼈만 남고 그 뼈는 항상 깨끗하게 유지될 온기를 명당이라 할 수 있슬까??
좀 더길면 엉터리 천기누설이라 꼬리밟힐랴...
그만 그치며, 평창 하리유적의 유골은 이렇게 깨끗히 있다가 공기로 나오게되자 산화되며 일반적인 검은색으로 변화한
것은 역 환골로 이곳이 2,500년동안 명당자리였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것도 없이 최고의 명당자리이고 그 산하는 평창의 산과 들은 길지라는 것이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아래 평창 뜰을 휘어감는 산세와 맑은 내, 인심좋은 평창은 나의 어린시절 정서가 담겨있는 곳으로
이곳, 해맑은 평창의 들녘이 이러한 대명당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정선 아리랑처럼 억지 논리라면 그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에 맞기기로 한다.

<사진 참조>
위의 사진에 50센티 정도의 검은 사각구멍이 한 기의 묘이다.
옆의 빨간 모래주머니 몇개 들어갈 공간이 한 기의 묘라하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숙제에 고고학자들은 어떤 답인지는 모르겠으나 화장을 하고서 그 뼈를 추려 매장했슬까?? 아니면 풍장을 했슬까??
또한 순장의 풍습은 아닐까??
ghghghghghghghghghghghghgghhghhhghghhhghghghghghghghghghghhhhghgh

청동 검의 각부 명칭은 ..

(상; 평창 하리유적 출토당사의 석실내 비파형 청동경의 원래 보존모습)
(하; 출토 후의 모습)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에서 발견된 비파형 청동검은 상당히 양호한 보존상태이라 합니다.
여기서 비파형 청동기는 슴베에 칼 자루를 끼우는 2단 형식으로 이는 고조선 청동검의 특징이며또한 우아한 곡선의
비파형으로 이번 평창에서 출토된 청동검은 비파형에서 세형으로 넘어가는 비파형 말기의 청동검임을 위 사진에서
알 수 있다.

 이 검은 꿩털 모양새처럼 중앙부에 등대라는 둥그런 마디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청동검의 구부럼방지이기도 하지만
살생시 뺄때 진공에 기포 주입효과의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검날 중앙부에 돌기는 적당한 깊이로 찌르도록하는
표시로 장식성을 가지고 있다.

 철은 용융점이 1,530도이지만 청동기는 1,030도이기에 화목의 화력으로 쉽게 녹일수 있어 청동가 시대가 도래되었다.
인터넷엔 철기 시대가 먼저왔고 청동기 시대가 후발로 왔다는 이야기들은 없는데 그것은 초교시절부터 배운 것이다.
철기는 제련법이 좀 쉬워 일찍 제련법을 발명들 하지만 화목으로는 200도가 낮아 녹이기 힘들었고, 이런 이유로 청동기
시대가 먼저 왔었다.

청동기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철보다는 원석을 구하기가 좀 어려웠으며, 강도가 연하여 장삭용등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세형동검 시대엔 복합적으로 철기시대가 도래된다.

초기의 철기시대는 세형동검 시기와 병행도 되는데 초기의 철기는 화목의 화력이 낮은 이유로 탄소 함유량이 적은
잡철을 만들어서 농경도구로 사용하지만 녹이 슬고 강도가 약하였다.

 세형동검 이후 시기엔 철기문명이 도래되지만, 양질의 주철은 AD 1,000년경 중원의 작은나리인 송나라때 세계
철기3/4 이상을 생산하였는데 그들은 풍로를 발명하고 숯을 만들어 화력을 200도 더 올려 강질의 주철을 만들게
되었다.
( 나의 글 "황사는 천재지변인가 인재인가??에서 보면 아마 역사책 수십권을 뒤져도 없을 내용이 있다)

*********댓글 중에서*****************************************************
신승엽 16.09.17. 20:49
<사진참조>
관련 책을 소개드립니다.
고조선,우리역사의 탄생에 관한 기술입니다.
우리나라 비파형동검문화의 개시 연대는 만주지역 발굴자료로 서기전 16~14세기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이 책에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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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댓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댓글의 연대는 청동기 시작의 연대입니다.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00년경에서 기원전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하며, 민무늬토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민무늬토기 시대라고도 합니다.

청동기 시대를 지역적으로 일명 민무늬 토기시대라 부르는 것은 청동기 시대가 없이 철기시대가 다가온 지역도 있어서,
그에 구분법이며, 대부분의 비파형동검은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어, 고인돌에 동반되는 유물로 파악하고 있다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은 모두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는 시각이 퍼져 있으나 일반적으로 미송리형토기, 탁자식
고인돌 등이 동반되는 경우에서고조선의영향권에 속한다고 보며, 그 이외의 비파형동검은 동호족(산융족) 등의
문화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런데, 평창의 비파형 청동검의 특징은 14기 묘에서 미송리 토기는 출토되지는 않은듯 하지만 마제석기등이 다수
매장품이 출토 되었으며 일반적인 고인돌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석실에서 출토된 점이다.
석실은 측벽을 석조가 아닌 호박돌등으로 쌓은 원시적인 상태이지만 2,500여년 시간에도 헐어짐도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었는데 당시 얼마나 성의있게 쌓았는가를 알 수있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청동기 시대에 대한 견해는 비파형 청동검이 미송리 토기와 고인돌이 함께 존재하면 고조선
청동검이라 보는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로 해석해서 평창 하리 유적은 그러한 일반적 설명엔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산융족 청동검은 아니다.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검의 쇠락기로 세형 청동검으로 변형되기 전의 시기이며 이는 고인돌에서 석실로 전향되는
석실 초기의 시간대이기에 일반적인 설명으로 부족한 것으로 평창 하리 청동기의 시기적 변화와 초기적 석실의
학술적 자료와 증거로 보존적 가치를 높이해야 할 것이다.

 지난 춘천의 중도 인공섬에 1,000억의 영국계 자금이 들어와 위락시설 공사도중 청동기 발굴은 400㎡정도의
섬자체가 청동기 유적지로 약 100여기의 주거지와 40여개의 비파형 청동검등이 발굴되며, 우리나라 단일 유적으론
최대의 청동기 문화가 발견 되었다.

그런데, 뭔가 너무나 빠른듯한 9개월만에 출토 종료되었으며, 이젠 시민들의 잇달은 건의에 힘입어 출토지도 보존으로
 가닥이 잡혀가며 중도 관광사업은 빨간불이 되는듯 하다.

여기에서도 보면 시민들의 의지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도 유적은 90여기가 넘는 고인돌에서도 유골의 뼈는 녹아 산화되어 젼혀 없고 동검은 녹슬은 상태이지만, 평창 하리
석실의 동검은 석실에서 유골과 함께 잘 보존되어있어 고대인들도 고인돌보다는 석실이 더 좋은것이란 점도 간파한듯
하다.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은 이러한 석실의 태동을 가져오는 초기적 석실의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평창 하리 유적은 이러한 청동검과 무문토기인 미송리 토기가 출토되는 비파형 청동기 시기의 학계의 일반적 이론엔
없는 세형동검 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중요한 학술자료일듯 싶다.

또한,피장자의 인골은 古인골 학회로 넘겨져 DNA를 통하여 현대과학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측정하여 자료화 하게되며
청동기 시대의 표준으로 평창인이 고조선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될 듯하다.
또한, 인골은 지역 박물관이 없슬시는 고인골 학회에 보관될듯 싶다.

 
요즘 DNA 자료는 개인이 머리카락이나 손톱등 신체의 일부를 소포로 보내면 샘플 표본에 의한 의학적 상태를 알수있는
시대로 정밀한 조사를 디지털화하여 보존하며 부여 구석기 박물관의 구석기인 영상자료같은 청동기시대 청동기를 가진
고조선인들의 일상을 시물레이션화한 영상으로 제작이 될 것입니다.

이 제작의 자료엔 피장자의 DNA 검사자료로서 그의 식사,그의 환경을 토대로한 고조선인의 샘플의 표준은 평창산하의
평창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창인들은 평창지자체의 발의에 의한 지역 박물관과 이 유적지를 보존해야 할 사명을 지니게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영상매체도 우리의 지역 박물관이 없어서 다른곳, 아마 강릉등지의 박물관에서 히트치면 평창은 또 한번
좋은 소재를 잃어버리고 평창을 자랑할 테마인 평창의 위상을 잃게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 박물관에 위탁되면 마치 한치뒷산의 아리랑을 가져간 정선은 몇 해전 성마령에다가 이곳 정선에서 성마령을
넘어 미탄으로 아리랑이 전래되었다는 아주 샛빨간 공산당식 어거지도 통하게 되며 평창은 뒷다마를 맞은 것입니다.
먼 후일 이런 우(憂)보다는 평창군민 스스로의 노력으로 우리것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평창 고조선(가칭) 박물관의 태동은 이곳 평창의 천동, 종부, 주진, 임하, 상리등지의 구석기 유물들도 함께
전시하여 이 고장의 역사를 통하여 과가에도 살기좋은 명품고장임을 증명함과 아울러 주변지역의 영월, 정선보다
먼저 앞서 태백 영서의 고 유적 메카로 부상해야 할 것입니다.

평창 하리유적은 지금도 문화재로서 앞으로 심의에 어떠한 귀결과 상관없이 이땅의 후손으로서 스스로가 보존하여
그 가치를 높여야 할때입니다.
또한 매장자의 유골은 고인골학회의 검사 자료화와 결손 뼈인 대퇴부등이 보강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 모실 박물관이 없으면 그는 평창인으로 죽어서도 영원히 평창에 묻혔지만 2,500여년지난 어느날
이 지역 후손들의 불찰로 고향을 등지고 유랑길에 오른다면 이 또한 좋은 모양새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피장자의 유해를 이 고장의 선인으로 이땅에 모셔야 당연한 도리이며, 또한 우리는 먼 후대인으로 이땅에 전국에
하나뿐인 청동기 시대인의 가칭 <고조선인을 만나러 평창으로 가자!!>는 등 고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선조에 대한
제를 지냄과 또한 전 국민적인 고조선 역사의 장으로 하는 평창의 테마로 자리잡게 노력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평창 하리 청동기 유적"에 대한 저의 소견으로 모든 평창인들은 중지를 모으고 군 지자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역사를 소명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밝은 미래의 평창을 위한 도전에 전력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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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평창초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 2년전 저의 글중엔 '현대사회가 존재하는 한 시대를 넘어선
지성으로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될 가산 이효석 선배님의 동상을 모교에 건립하여 모교의 동문으로
그 이름을 빛내며 또한 자라나는 후학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하여 주기위한 모뉴먼트적인 기념상을
만들자"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신 어느 선배님의 부족한듯한 설명이지만 이 제안으로 모교에 가산 이효석 선배님의 동상이
세워졌듯이...저의 조그만 글 한줄이라도 후일 평창에 영서의 역사의 메카인 역사 박물관 건립과 이로
인하여 평창은 영서의 기수로서 거듭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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