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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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3-29 07:22 조회3,583회 댓글1건본문
일전 두 편의 글에서 율곡 이이선생의 잉태지인 판관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피력하였던바 이 글에서는 판관대 비석명문의 내용이 좀더 보완되어 이곳 백옥포리가 율곡의 고향임과 동시에 판관대의 구체적 내용을 명확해게 전하여 율곡의 고향에대한 바른 이해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지난 글에서 율곡학회의 신 사임당 연표에 의하여 신 사임당은 19세에 결혼을 하고 21세에 서울에서 시어머니에게 혼례를 드리고 이후 백옥포리에서 신혼살림을 하였으며, 결혼12년째에 셋째인 "이"(율곡 이이)를 오죽헌에서 낳았다.
그리고 결혼 일팔년되는 해에 종가인 덕수이씨의 살림을 맡아서 서울 수진방으로 이사하였다고 했으며, 이로서 이곳 백옥포리에서 율곡은 여섯살까지 살았기에, 이곳 평창의 백옥포리는 율곡의 고향인 것이다. (당시로서는 강릉부 관할지역임)
백옥포리의 그의 생가엔 율곡 이이선생의 잉태지의 "판관대"라는 특이한 역사를 갖고있다.
여기서 잉태지란 단어적 의미는 좀 이해력을 가지고 보아야 되는 것이다. 왜냐면 자기 집에서 아들을 낳았는데,출생지는 미국 병원이고, 먼 후일 아들이 큰 인물이 되었다고 자기집은 생가로서의 출생지가 아닌, 즉 고향이라기보다는 잉태지라 표현한다면 그것도 우리네 상식엔 좀 어패적 표현이리라.
그러지만, 백옥포리 율곡의 생가는 잉태지란 이야기를 들은 임금이 사패지도 하사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이원수公의 직업이 세금을 걷어들이는 조세직으로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현장을 다니며 세금을 부과하여 세수의 쌀을 한양으로 실어나르는 직책이라 후일 수운판관(종 5품)까지 승진하는데, 이러한 외근직 직책으로 장기간 출장이 잦아, 마치, 대화의 주막의 기생이 이원수 공에대한 일화는 문란해지기 쉬운 환경속에 곧은 그의 품행을 증명하듯, 이러한 입장에서 외도가 아닌 자기 집을 잉태지라 했슬까??
하지만 이러한 의문보다는 후일 이이선생의 명망이 높아지자 오죽헌은 율곡 이이선생의 출생지라고 하며 몽룡실은 태어난 곳이라는등 오죽헌은 그의 탄생에 신화적 성격을 띄게되자 이곳 백옥포리의 생가는 이에 대응하여 잉태지란 이야기를 더욱 부각하게 되었던 것이란 자답은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란 느낌이다.
판관대는 생가라는 자동의 서술적 표현을 버리고 잉태지란 상징적 이야기만 회자되며, 율곡의 이야기중 특징 하나는 그에겐 고향이란 단어는 기록되지 않는데, 딱 하나 인터넷 위키 백과사전에서 "오죽헌"을 검색하여 보면 첫마디에... "오죽헌(烏竹軒)은 보물 제165호로,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생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첫번째 나의 글중엔 친구들에게 율곡선생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고 물으니 친구들은 오죽헌 하길래 틀렸습니다.
오죽헌은 외가집이죠?? 그러면 그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 하고 재차 물으니 친구들은 넌센스 퀴즈인줄 알고 "엄마 뱃속"하는등,,,우리 모든 사람들의 생각에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어있다.
역사에서 유명인물들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릴적 신동으로 자라는 것이라는 수식어는 공식인데 율곡선생은 고향은 어디인지 기록되지 않는다. 단 잉태지 판관대만 존재할뿐,,,
오죽헌은 신 사임당의 생가로 율곡선생에겐 외가집이다.
여기에 어느 학자는,, "옛날의 그때는 결혼관념이 지금과는 다르기에 처가에서 하는 모호한 표현을 하는 학자들도 있던데..."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오죽헌에서 살았다 하는 것이라면,,...
그는 이미 백옥포리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학자들은 남의 글엔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아집의 독단적 오류를..
또한 위의 예문에 보듯 위키백과사전에서 오죽헌이 율곡 이이선생의 생가라는 것도 오류이다. 아마도 위키 백과사전의 단점은 여기 저기서 주워다 놓고, 감수자의 철저한 노력이 없는게 아킬레스 건이다.
후일의 사람들은 율곡선생의 백옥포리 생가를 잉태지와 바꿔먹은 것이다.
율곡의 탄생지 오죽헌과 허균의 탄생지 초당과 그 부근의 김시습의 탄생지는 강릉을 전국 제일의 명당으로 자초하는 인상이다. 이렇게 오죽헌의 몽룡실만 화두에 오르자, 백옥포리에선 이곳이 수태극의 동방의 성현이 나올만한 곳으로 이곳이 잉태지라는 이야기가 나온듯 하다.
이러한 가설로 이해해보면서 판관대 비석의 명문에 기록되어있는 미약한 글들을 들춰본다.
명문의 중간 구절에서 "율곡의 탄신일인 1536년 12월 26일(음)에 맞추어 1537년 음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라는 글에서 그러한 기록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위 글에 그 출처도 없어 어디서 옮겼는지 알수도 없다.
이렇게 이해력이 없는 문장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집을 옮기면 이사햇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선 이사했다도 아닌 옮겼고 하는 미약한 단어는 그해 12월 탄신일을 역으로 10달 만삭의 날을 맞춘듯한 가식으로밖에 인식이 않되는 것이다.(신 사임당은 결혼 12년차에 이곳 백옥포리 거주 10년째에 율곡을 낳았다)
그리고 "수운판관직에 있던 이원수公이 빌미를 얻어 이곳으로 귀가하여 잉태하였다는" 표현엔 물론 "음 2월 이곳으로 옮겼고" 하는 선행 글이 가식이라면 부대적인 이 글도 가식이지만, 이에 앞서 표현상에도 꼭 짜투리 빌미가 아닌 휴가에 백옥포리 본 집으로라고 표현한다면 그 이해가 빠를텐데...여기에 자기집을 이곳으로라고 표현하는...마치 특별한 곳에서 잉태한듯한..
그리고 수운판관이란 종 5품 관직으로 이원수公의 나이 50에 오른 벼슬직이다. 이때 율곡의 나이는 15세이다..
(*주; 율곡학회 신 사임당 연표에 사임당은 19세때 덕수(德水) 이(李)씨 원수(元秀)공(이때 22세)에게 출가하다. 그리고 다음줄에 신사임당 나이 47세때 부군 이원수 공은 수운판관에 오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렇듯 율곡의 생가의 판관대 명문의 기록의 표현이 최소한 나로서는 좀 어슬픈 문장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판관대의 율곡의 생가 표지판에서부터 이런 느낌을 받으니 위키 백과사전에서 '오죽헌이 율곡의 생가'라 하는 오류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사항이다.
이제 우리는 현종이 하사한 대성현의 잉태지 판관대를 이런 느낌에서 새로히 정리하여야 한다.
만약 오죽헌의 몽룡실의 출생지를 들고 나오지 않았으면 이곳이 율곡이 태어난 생가이고, 그럴때에도 생가에 출생지인데, 특별히 잉태지라 표현할까 생각해 보면 잉태지란 단어는 출생지의 반대되는 상대적 언어이다.
그 선생왈,, 율곡은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결혼관은 지금과 달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는 식의 이야기에..지금과 다르면 이원수공이 처가살림에 데릴사위란 점인가?? 정확히도 모르고 맞지도 않는 애매한 이야기를 한다.
"판관대, 이곳은 율곡학회의 연보에 의해서 보듯, 율곡 이이선생의 생가터로 신 사임당은 이원수公과 이곳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첫째 아들 "선'은 친정 아버지가 서울서 별세로 서울에 거처하며 출생하였으나 세쩨인 "이"는 그 후 12년 후에는 아마도 홀로계신 시어머니의 병환을 돌봐드리려 오죽헌에 내려가며 이원수공이 출장에서 돌아와 휴가시엔 백옥포리 생가로 귀환하는듯한 생활속에, 율곡을 오죽헌에서 출생하였던 것이란 생각이지 오죽헌이 율곡의 고향이란 잘못된 서술은 잘못된 것이다.
출생지 오죽헌엔 몽룡실이 있다면 그의 생가인 판관대는 잉태지로서 이곳 백옥포리의 산세의 수태극의 정기를 받아 잉태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 사임당은 결혼 1팔년에 (율곡이 여섯살 되던해에) 덕수이씨 문중 살림을 맡으러 서울로 이사하였기에 백옥포리는 율곡의 어린시절의 고향이며 그의 생가터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잉태지"란 대성현의 출현을 알리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판관대 현판의 문장은 좀 더 기록에 의한 사실의 이해로 다가서야 좋을듯 하다.
이번 글은 율곡선생과 판관대에 대한 세번째 마지막 글로 이것이 후세백작의 판관대를 바라보는 사색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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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율곡 이이 선생의 존칭을 붙여야 마땅합니다만,,,
나폴레옹,,, 하는 영웅의 이름 뒤에는 자연 존칭이 생략되는게 일반적입니다.
또한 신 사임당 초상화는 고액권 오만원짜리에,, 율곡은 일만원권에...
이것은 일만원권이 먼저 나와 그러했겠지만 어쪘든 영웅은 소액권으로 내려가는것도 일반적 사항들 입니다.
+++++++++++++++++++++++++++++++++++++++++++++ 終 ++++++++++++++++++
지난 글에서 율곡학회의 신 사임당 연표에 의하여 신 사임당은 19세에 결혼을 하고 21세에 서울에서 시어머니에게 혼례를 드리고 이후 백옥포리에서 신혼살림을 하였으며, 결혼12년째에 셋째인 "이"(율곡 이이)를 오죽헌에서 낳았다.
그리고 결혼 일팔년되는 해에 종가인 덕수이씨의 살림을 맡아서 서울 수진방으로 이사하였다고 했으며, 이로서 이곳 백옥포리에서 율곡은 여섯살까지 살았기에, 이곳 평창의 백옥포리는 율곡의 고향인 것이다. (당시로서는 강릉부 관할지역임)
백옥포리의 그의 생가엔 율곡 이이선생의 잉태지의 "판관대"라는 특이한 역사를 갖고있다.
여기서 잉태지란 단어적 의미는 좀 이해력을 가지고 보아야 되는 것이다. 왜냐면 자기 집에서 아들을 낳았는데,출생지는 미국 병원이고, 먼 후일 아들이 큰 인물이 되었다고 자기집은 생가로서의 출생지가 아닌, 즉 고향이라기보다는 잉태지라 표현한다면 그것도 우리네 상식엔 좀 어패적 표현이리라.
그러지만, 백옥포리 율곡의 생가는 잉태지란 이야기를 들은 임금이 사패지도 하사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이원수公의 직업이 세금을 걷어들이는 조세직으로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현장을 다니며 세금을 부과하여 세수의 쌀을 한양으로 실어나르는 직책이라 후일 수운판관(종 5품)까지 승진하는데, 이러한 외근직 직책으로 장기간 출장이 잦아, 마치, 대화의 주막의 기생이 이원수 공에대한 일화는 문란해지기 쉬운 환경속에 곧은 그의 품행을 증명하듯, 이러한 입장에서 외도가 아닌 자기 집을 잉태지라 했슬까??
하지만 이러한 의문보다는 후일 이이선생의 명망이 높아지자 오죽헌은 율곡 이이선생의 출생지라고 하며 몽룡실은 태어난 곳이라는등 오죽헌은 그의 탄생에 신화적 성격을 띄게되자 이곳 백옥포리의 생가는 이에 대응하여 잉태지란 이야기를 더욱 부각하게 되었던 것이란 자답은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란 느낌이다.
판관대는 생가라는 자동의 서술적 표현을 버리고 잉태지란 상징적 이야기만 회자되며, 율곡의 이야기중 특징 하나는 그에겐 고향이란 단어는 기록되지 않는데, 딱 하나 인터넷 위키 백과사전에서 "오죽헌"을 검색하여 보면 첫마디에... "오죽헌(烏竹軒)은 보물 제165호로,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생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첫번째 나의 글중엔 친구들에게 율곡선생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고 물으니 친구들은 오죽헌 하길래 틀렸습니다.
오죽헌은 외가집이죠?? 그러면 그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 하고 재차 물으니 친구들은 넌센스 퀴즈인줄 알고 "엄마 뱃속"하는등,,,우리 모든 사람들의 생각에 율곡의 고향은 상실되어있다.
역사에서 유명인물들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릴적 신동으로 자라는 것이라는 수식어는 공식인데 율곡선생은 고향은 어디인지 기록되지 않는다. 단 잉태지 판관대만 존재할뿐,,,
오죽헌은 신 사임당의 생가로 율곡선생에겐 외가집이다.
여기에 어느 학자는,, "옛날의 그때는 결혼관념이 지금과는 다르기에 처가에서 하는 모호한 표현을 하는 학자들도 있던데..."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오죽헌에서 살았다 하는 것이라면,,...
그는 이미 백옥포리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학자들은 남의 글엔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아집의 독단적 오류를..
또한 위의 예문에 보듯 위키백과사전에서 오죽헌이 율곡 이이선생의 생가라는 것도 오류이다. 아마도 위키 백과사전의 단점은 여기 저기서 주워다 놓고, 감수자의 철저한 노력이 없는게 아킬레스 건이다.
후일의 사람들은 율곡선생의 백옥포리 생가를 잉태지와 바꿔먹은 것이다.
율곡의 탄생지 오죽헌과 허균의 탄생지 초당과 그 부근의 김시습의 탄생지는 강릉을 전국 제일의 명당으로 자초하는 인상이다. 이렇게 오죽헌의 몽룡실만 화두에 오르자, 백옥포리에선 이곳이 수태극의 동방의 성현이 나올만한 곳으로 이곳이 잉태지라는 이야기가 나온듯 하다.
이러한 가설로 이해해보면서 판관대 비석의 명문에 기록되어있는 미약한 글들을 들춰본다.
명문의 중간 구절에서 "율곡의 탄신일인 1536년 12월 26일(음)에 맞추어 1537년 음 2월에 이곳으로 옮겼고"라는 글에서 그러한 기록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위 글에 그 출처도 없어 어디서 옮겼는지 알수도 없다.
이렇게 이해력이 없는 문장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집을 옮기면 이사햇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선 이사했다도 아닌 옮겼고 하는 미약한 단어는 그해 12월 탄신일을 역으로 10달 만삭의 날을 맞춘듯한 가식으로밖에 인식이 않되는 것이다.(신 사임당은 결혼 12년차에 이곳 백옥포리 거주 10년째에 율곡을 낳았다)
그리고 "수운판관직에 있던 이원수公이 빌미를 얻어 이곳으로 귀가하여 잉태하였다는" 표현엔 물론 "음 2월 이곳으로 옮겼고" 하는 선행 글이 가식이라면 부대적인 이 글도 가식이지만, 이에 앞서 표현상에도 꼭 짜투리 빌미가 아닌 휴가에 백옥포리 본 집으로라고 표현한다면 그 이해가 빠를텐데...여기에 자기집을 이곳으로라고 표현하는...마치 특별한 곳에서 잉태한듯한..
그리고 수운판관이란 종 5품 관직으로 이원수公의 나이 50에 오른 벼슬직이다. 이때 율곡의 나이는 15세이다..
(*주; 율곡학회 신 사임당 연표에 사임당은 19세때 덕수(德水) 이(李)씨 원수(元秀)공(이때 22세)에게 출가하다. 그리고 다음줄에 신사임당 나이 47세때 부군 이원수 공은 수운판관에 오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렇듯 율곡의 생가의 판관대 명문의 기록의 표현이 최소한 나로서는 좀 어슬픈 문장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판관대의 율곡의 생가 표지판에서부터 이런 느낌을 받으니 위키 백과사전에서 '오죽헌이 율곡의 생가'라 하는 오류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사항이다.
이제 우리는 현종이 하사한 대성현의 잉태지 판관대를 이런 느낌에서 새로히 정리하여야 한다.
만약 오죽헌의 몽룡실의 출생지를 들고 나오지 않았으면 이곳이 율곡이 태어난 생가이고, 그럴때에도 생가에 출생지인데, 특별히 잉태지라 표현할까 생각해 보면 잉태지란 단어는 출생지의 반대되는 상대적 언어이다.
그 선생왈,, 율곡은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결혼관은 지금과 달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는 식의 이야기에..지금과 다르면 이원수공이 처가살림에 데릴사위란 점인가?? 정확히도 모르고 맞지도 않는 애매한 이야기를 한다.
"판관대, 이곳은 율곡학회의 연보에 의해서 보듯, 율곡 이이선생의 생가터로 신 사임당은 이원수公과 이곳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첫째 아들 "선'은 친정 아버지가 서울서 별세로 서울에 거처하며 출생하였으나 세쩨인 "이"는 그 후 12년 후에는 아마도 홀로계신 시어머니의 병환을 돌봐드리려 오죽헌에 내려가며 이원수공이 출장에서 돌아와 휴가시엔 백옥포리 생가로 귀환하는듯한 생활속에, 율곡을 오죽헌에서 출생하였던 것이란 생각이지 오죽헌이 율곡의 고향이란 잘못된 서술은 잘못된 것이다.
출생지 오죽헌엔 몽룡실이 있다면 그의 생가인 판관대는 잉태지로서 이곳 백옥포리의 산세의 수태극의 정기를 받아 잉태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 사임당은 결혼 1팔년에 (율곡이 여섯살 되던해에) 덕수이씨 문중 살림을 맡으러 서울로 이사하였기에 백옥포리는 율곡의 어린시절의 고향이며 그의 생가터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잉태지"란 대성현의 출현을 알리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판관대 현판의 문장은 좀 더 기록에 의한 사실의 이해로 다가서야 좋을듯 하다.
이번 글은 율곡선생과 판관대에 대한 세번째 마지막 글로 이것이 후세백작의 판관대를 바라보는 사색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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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율곡 이이 선생의 존칭을 붙여야 마땅합니다만,,,
나폴레옹,,, 하는 영웅의 이름 뒤에는 자연 존칭이 생략되는게 일반적입니다.
또한 신 사임당 초상화는 고액권 오만원짜리에,, 율곡은 일만원권에...
이것은 일만원권이 먼저 나와 그러했겠지만 어쪘든 영웅은 소액권으로 내려가는것도 일반적 사항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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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문화원님의 댓글
평창문화원 작성일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