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 아라리에 대한 나의 분석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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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2-05 12:29 조회4,695회 댓글0건본문
["만수산" 아라리에 대한 나의 분석이해]
후세백작 2013.12.07 17:04
평창, 정선 아라리 가사 중에 하나로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에 대한 일반의 생각과는 전혀 상반되는 나의 이해의 글을 쓴다.
위의 가사는 위치적 공간 파악과 역사적 시간대를 찾아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사이리라.
그러나 이 후세백작은 그런 편류의 생각과는 상이한 점을 아래에 서술함에 누구든지, 또는 어느 아리랑 연구가이라도 이견이 있다면 제시 바랍니다.
위 가사가 정선 아라리의 시원설로 굳혀지는 것엔 정선교육청의 아리랑 지도 자료 "정선 아리랑"에서 위 가사가 정선 아리랑의 시원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600년 전 조선 개국 시 고려 유신들중 이초가 중국으로 귀양가서 자결 후 이초의 문하생 7명이 전오륜의 고향인 정선 두문동으로 낙향하여 여말 임금에 대한 애뜻한 충심으로 불렀다는 아리랑이라고 결론 맺으며 현존 아리랑 중 최고(最古) 상한대의 시원 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의 편견에 후세백작의 辨을 달아 보기로 한다.
과연 정선 교육청의 이러한 주장에 그들이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기에 지금 "만수산"이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 600년 전 그들 임금님을 사모하며 불렀다는 주장이 역사로 인정되는 이러한 愚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을 찾아서"에서 오대산에 은둔한 이색의 글들을 사료로 시원설을 유추하지만 이 점의 이해는 다음에 논하기로 한다.>
역사란 그 자체기록이 없으면 그는 역사로 기록할 사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선 아리랑의 시원은 위 가사의 "만수산~'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매우 억측으로 역사 소양에 아둔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만수산'이라는 아라리의 가사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 단어의 가장 첫째로 역사 사실의 확인으로, 고려 말에서 이조 초기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개국파들은 이미 정몽주도 죽였고, 2차 왕자의 난에 이성계 후실 강씨 부인의 아들들인 두 왕자도 죽인다. 이후 방원은 술집에서 "이직"과 대작하던 "정도전"을 그 자리에서 참살을 한다. 무론 표전문의 화근이 구실이겠지만..
또한, 이 초는 다시 중국으로 귀양 가서 자결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동향 정선 출신의 후학인 전 오륜을 위시하여 일곱 명의 문하생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멀리 숨어야 했다.
이 위기의식이란?? 일반적으로 귀양을 보내고 사약이 따라붙는 패턴의 과정으로 즉시 처형하는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반 저항을 없애고 처형을 하는 과정이다.
스탈린 시대에 트로츠키. 말렌코프는 멕시코등지로 망명을 갔으며 그 일년 뒤 권총이 뒤 따랐듯이 당시, 이 시기는 조선 개국 후이라도 혁명 과도기라 방원은 반혁명이나 조선 개국에 반하는 사례들에는 만약 조선의 개국혁명이 실패로 끝날 경우 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가 봐 조선 역성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누구든지 이에 반하는 자는 정도전의 참수에서 보듯, 바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무서움 그 자체였슬 것이다.
물론 이 죽림칠현의 선비들도 그러한 상황인식을 하였기에 피난길에 오른 것 아닐까??
이러한 혁명 과도기에 고려 유신 일곱명이 집단으로 전 오륜의 고향 정선으로 내려오기까지...아리랑을 부르며 곧바로 내려 왔다면 그 소문은 쉽게 방원의 귀에 들어갈 수가 있었고 방원이 알았다면, 이는 후일을 도모하는 역적의 집단으로 판단하고 그 즉시 단칼에 처치하였슬 것이다.
방원은 태종으로 재임시 세종을 데리고 평창까지 강무행사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사냥을하며 섭렵을 하는 극기훈련)로 두 번이나 다녀갔다 한다. 이때 두문동에 죽림 7현이 기거한다는 소스를 주는 자가 생기지나 않을까??
아니면 아직 이 시기에도 그들은 피신치 않은 상태였슬까??
아마, 죽림칠현은 이초가 중국서 자결후보다는 정도전을 술집에서 참수 후 생명에 더한 위협을 느꼈슬 것이고 이후 시간대에 낙향을 하였던 것 아닌가 하는 추정도,
여말 조선 개국의 혼돈의 시기에 전오륜이 고향땅 정선이 산간오지라고 동료들을 데리고 갔다면 이를 낙향으로 볼 수 있슬까?
아마도 방원의 눈에는 반 혁명동지로 와전돼 보일 것이기에 죽림칠현의 선비들도 그렇게 무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칩거하였듯이 죽림칠현도 처음엔 세상을 뒤로하고 깊은 산중으로 숨어 버렸슬 것이다.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그토록 죽이지 말라던 정몽주도, 정도전도 죽이는 이러한 공포정치 가운데 죽림 7현은 모두 정선으로 낙향하여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나 읇조렸을 것 처럼 만수산 가사의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행복했슬 시간은 아니란 점이다.
이들은 지금 서울서 정선은 불과 3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아마 1~20년 후 즉, 세종 때나 아니면 아주 안정적 시기는 성종 때일 수 도 있는 것이다.
세종 초기까지는 조선 개국이 20년 되어 가능한 시간대이다. 성종 때는 이미 한세대가 지나간 시간대일 것이고 그럼 그때까지 이들은 숨어 살았슬까??
위 역사를 잠시 볼 때 그들은 바로 정선 두문동으로 낙향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으로 들어 갔듯이, 전오륜이 한양을 다니며 잘 알고 있었슬 듯한 먹거리도 많은 깊은 산은 미탄의 청옥산이란 점이다. 그들은 방원의 개혁 주도세력에 대항하지 못하기에 이곳, 오지의 산속인 청옥산에 잠적했지 않았슬까??
이 청옥산 해발 1,200m의 고지이지만,여타 산과는 다르게 육백 마지기라는(180,000평) 고원으로 산나물이 지천으로 나며, 토양과 기후도 좋아 화전민이 기거하기에 용이한 산세란 점이다.
또한 사방이 트인 오지라 도망가도 어느 방향인지 모를 정도로 지형적으로도 용이한 지점이다.
여기서, 그들이 정선 전오륜의 고향으로 바로 가지않고, 방원의 서슬퍼런 탄압에 처음엔 깊은 산으로 숨어 들어갔슬 것이고, 이후 시기가 완화되어 정선으로 귀착하였을 것이기에, 그들이 부른 가락이 있다면 노래의 배경무대는 평창에서 정선 사이에 걸쳐야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 가사를 보면은,,,""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라는 가사는 송도의 여말 임금님이 계신 만월대 뒷산에 구름이 막 모여 임금님에게 비를 뿌린다는 해석은 문체나 문장의 대상자 또, 시제나 문법, 어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왜냐면 이 가사는 지금 현재를 이야기 하지만 전오륜등의 두문동에서 개성을 보고 절을 하고 하는 것이 당시 상황은 아닌듯한 것이다. 먼 후일 두문동을 찾아 들어간 후의 일일 것이다.
강원도 산간오지에 사는 사람들이 송도의 만수산에 검은 구름이 모이는지 어떻게 알까??
그러면 이를 주객을 바꿔서 보기로 하자, 즉 정선에 비가 올 등 눈이 올등 만수산에서 검은 구름이 나에게로 막 몰려 든다.
이 노래 부를 때 검은 구름이 내 머리 위에 몰려오는데 그 구름이 만수산의 검은 구름일까?? 이러한 가사가 전오륜등 거칠현동 7인의 선비들이 정선에서 임금님을 사모하여 부른 아리랑 가사입니까??
이 가사는 전오륜등 7현이 정선의 거칠현동에 은거하면서 임금님을 사모해서 부른 노래가 아니다.
이 가사에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이야기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자칭 아리랑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를 현존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에 불리우던 아리랑으로 정선 아리랑의 기원설에 적용하는데 이의가 없었다면 이는 큰 오류이고 그 이전에 아리랑의 정체성에 괴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정체성의 괴리를 갖는다는 이야기는 아리랑은 민초들의 삶의 애환의 서정적 표출의 가사들로 한정되어있지 역사의 서사적 내용의 가사는 전무하다, 그런데 유독 이 "만수산" 아라리가 나물 뜯을 때의 표현이라면 서정적이지만 임금을 그리는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면 서사적이기 때문에 아리랑 가사 전체에서 유독 이 가사만 서사적으로 돌출되는 모순을 가진다.
그럼 이 가사를 아래에서 다시 이지적으로 분해하여 보자.
이 문장은 만수산에 있던 검은 구름이 청옥산 높은 곳에 걸려서 눈이 될지 비가 될지 구분이 안 된다는 이야기로, 만약 이 구름이 구릉 아래에 실오라기 같은 산간의 하늘에서 구름이 비가 될지 눈이 될지의 가사는 맞지 않는다.
고원인 청옥산 산마루에 구름이 걸쳐서 비가 될지, 눈이 올지 알 수 없다는 표현이다.
이를 확증해 보기 위해선 5월쯤에 평창의 높은 산에 올라 (입탄고개나 유동리 고목나무쯤에서 보면 ,,, 동쪽의 가장 멀리에 있는 청옥산 정상엔 간밤에 마치 킬리만자로의 눈 사진처럼 정상부가 하얗게 눈이 내린 산을 볼 수 있다.
그때까지(눈이 내리지 않은 평상시기엔,,) 청옥산은 뾰족한 봉우리가 없으므로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4-5월에 나물뜯으로 산에 올라서 검은 구름이 비가 될지 눈이 될지 모르는 이러한 곳은 평창, 정선 사이에 이곳뿐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춘궁기인 봄철에 봄나물 뜯어 끼니를 연명하려고 청옥산에 올라 갔슬 때 갑자기 검은 구름 몰려오고 날이 흐려지자 해발 1,200m의 고지라 그 구름이 바로 비가 되어야 할 봄철에도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알 수 없다는 가사이지 이 가사가 전오륜등 거칠현동에서 은거하며 임금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충절의 노래는 전혀 아니란 점이다.
만약 충절의 노래였다면 이런 류의 가사가 아니라 사모하는 뜻의 단어가 포함되었어야 할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 가사는 조선 창업을 반대한 고려말 유신(遺臣)인 전오륜등 죽림7현이 정선 땅으로 가기엔 미탄을 지나야 했고 혹, 그들은 정선 두문동으로 가기 이전에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 칩거했듯이 먹거리 많고 산간오지인 미탄의 청옥산에 칩거하다가 이조가 중앙 집권화의 안정적 시기로 접어들며 칠현이 두문동으로 가고 옛 임금을 향하여 충절의 의표도 나타냈더라면, 당 시기 이후에 민초들이 봄나물 뜯으러 이 산에 오를제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들어 나물도 못 뜯고 피할 곳도없는 애틋한 심정일텐데 이 애틋한 심정의 뜻을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 지방 옛 설화에서 "만수산"이란 단어를 차입했던 것이다.
이런 예로 볼때, 해발 1,200 고지의 바로 이 청옥산만이 검은 구름이 비가되고 때로는 눈이 되는 곳이기에 이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는청옥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으로 청옥산 아래 화전민들의 거주지역인 두만이 마을은 산간 오지로 지난 7-80년대 까지에도 미디어나 외래인 교류도 없는 오지로서 그로 인해 아라리(이 지역 산간의 아리랑)은 독창적으로 전래되며, 또한 그 가사수가 늘어간 지역으로 지금 정선 아리랑에서도 평창군 미탄면 일대의 지역적 가사가 제일 많아 포함되어 있듯이 청옥산 아래의 두만이 마을은 이 지방의 아리랑의 보고였으며 지금도 이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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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기원설에 아리랑은 자연 발생적이기에 원조나 시원은 찾을 수 없다.
고대로부터 민초들이 삶의 애환을 달래려 부르던 가락이기 때문에 이는 고대인들의 시대에 인간 본연의 감정의 발생의 자연 발생적으로 보아야 하며, 그러기에 아리랑이란 그 가사가 어느 목적이나 정치적 사건의 비애등의 특유의 객체적 사건의 미화도 아닌 일차적으론 자기 자신의 세계에 국한되는 가사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가사와 단어들이 구전으로 수천 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일차적 자신의 세계라 함은 아리랑은 서사적이거나 객관적 내용의 뜻은 전혀 없다.
즉, 역사적 사실이라든가, 어떤 사건에 대한 염원의 기원등 이러한 내용은 전혀없고 민초들의 서정성을 지닌 풍부한 삶의 희노애락의 표출이다.
또한 민초들의 가사이지 사대부나 양반들의 가사도 없기에 그들 기득권 세력이 아닌 민초들의 삶의 표출로 승화되는 가사들의 노래인 것이다.
여기에 "만수산 검은 구름 막 모여 드네'란 가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기에 이 가사가 여말 전 오륜등의 유생들이 부른 노래가 아닌 것이다. 이런고로 가사도 시원을 600년으로 올려 잡을 수 없다. 그러한 기록도 없고 그러한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정선 관계자들은 정확한 기록을 제시하여야 하며 전오륜이 파직을 당하고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정선으로 가서 썼다는 "두문동 실기"란 책에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가??
정선 사랍들은 이 책과 전오륜과 만수산 아리랑 가사를 하나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아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주물러서 역사의 정체성을 왜곡시키는 정선사람들에게 나는 아리랑의 보편성과 타당성의 왜곡에 대한 실망이 크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바 매천야록에서 서술된 기록이며 또한, 역사적 서술의 기록성에 가장 접근한 문헌은 헐버트의 아리랑 기록에 가장 역사적 사료를 볼수있는데, 궁중에서부터 19세기 초 우리의 아리랑은 전국에 다시 유행 붐을 이루었슬때 이 가사가 화전민들 사이에서 봄나물 뜯으러 높은 산에 오르다 금새라도 쏟아부을 듯한 먹구름이 비가 될지 눈이 될지 알 수 없어 그 조급하고 애뜻한 심정을 표현하고자, 이 동네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여말의 이야기에서 "만수산"이란 단어의 뜻이 같은 애뜻한 심정이기에 이 단어를 아라리 가사에 차입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리랑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이야길 하지만 그것은 학자의 연구와 그에대한 검증을 거치는 학문적, 객관적 자료는 아니다. 오늘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후일엔 그것이 정설로 정립되는듯 하지만 역으로 환산해 보면 모두들 가설뿐이란 점이다.
* 헐버트의 논문중에는 한글이 영어보다 대중 의사소통이 우수하다고 결론지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아리랑에 모든 사람, 모든 감정이 쉽게 동화되는 부분의 이해도 아닌가 추정해 본다.
만약 역사적 사건이 아리랑에 반영 되었다면, 영서의 이 고장 일대 즉, 영월,평창,정선 일대의 아리랑속엔 이 지역에서 일어난 단종의 비애가 수십 가락은 족히 될 것인데 그에 대한 단어는 한점도 찾을 수가 없다. 또 나아가서 아마 구한말 당시에 일제의 강점과 고종황제의 하야등 우리의 국운이 멈추는 듯한 비애에도 한 줄의 가사도 없는 것이다.
아리랑은 이렇게 철저하게 서정적인 자기자신을 위한 가사로 스스로의 한탄속에서도 흥을 돋우는 이야기이지 결코 임금을 그리는 등 서사적 이야기는 전혀 아닌 것이다.
참으로 정선 아리랑 이론자들은 아리랑 발상지가 정선이라며 이러한 아리랑 자체의 의미도 모르며 그것을 정설이라 떠들고 있다.
(지금 나의 이 말이 남을 멸시하는 모순적인 생각이라면 언제던지 댓글로 이 모순점을 파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려말 전오륜등 유생들이 혹 "만수산 검은구름~"가사의 아리랑을 불렀다손 치더라도 민초들이 그 노래만 구전으로 600년 이어져 오지 않았다는 관점이다. 왜냐면 이러한 역사성 노래를 인식하였으면 이후 다른 역사 가사들의 아리랑이 수십곡 번성 하였슬 진데 오직 그것만 구전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민초들의 아리랑 가사를 보면 그들 스스로의 창의성과 해학성, 풍자성이 넘쳐 나는 것의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이 가사를 여말 임금님에 대한 애뜻한 심정으로 선비들이 불렀다면 민초들의 아라리에선 의미가 없는 가사가 될 수 있슬진데, 민초들이 나물 뜯다가 흐려진 날씨에 이 검은 구름이 비가 올까 눈이 올까~~라는 생각에 만수산 단어를 차입하여 만수산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자기만족의 가사가 되는 것이다.
즉, 아리랑은 스스로의 문제에 한탄등의 반어로 자가도취, 자기만족의 결과를 바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정선 아리랑에 시원을 이 만수산이란 가사로 잡고 600년전의 역사를 들먹이며 정선 아리랑은 600년이 되었다며 또한 더욱 웃기는 것은 이 "만수산' 단어 하나의 차입이 둔갑되어 아리랑 전체의 시원으로 잡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정선아리랑 지도자료 "정선 아리랑"의 222쪽중 8P에는 참으로 해괴한 논리를 펴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아리랑 문학연구,1990 P 192】
이 논리는 정선 아리랑이 아리랑의 시원으로 한가닥은 평창으로 전래되어 횡성 경기 서울로 퍼져나가 서울, 원산,대구, 부산 심지어 울릉도까지 퍼져 나갔으며, 또 한지류는 영월, 충주, 춘천, 밀양, 부산으로 그리고, 세번째는 삼척으로 진출하여 함흥, 영남지방까지 확산되었다는 이론이란다.
이 논지를 누가 옳다고 인정해 주리오만은...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세뇌시키는 교육이란 참으로 무서운 장난이기에 정선교육청은 그러한 논지의 교육을 당장 걷어 치워야 한다.
영, 평, 정은 한 바운더리의 동일성 공간으로, 하나의 문화권역 내에서 하나의 장르의 동일가사와 가락으로 이루는 동일문화권이였는데 영월은 그래도 외부와 저촉으로 인한 것으로 중화되고 말소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창과 정선지방엔 약 일천 오백수의 거의 같은 아라리 가사가 전래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정선이 시원이고 한양까지 퍼져 나갔다는 이론은...귀신이 나락은 까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이론은 맞지 않는 것이다.
그 이론이 맞지 않음은 스스로의 이론에서도 모순점이 파악되며, 만약 한양이든 부산에서 정선 아라리처럼 꼬리가 없는 아라리는 조금도 유행을 타지 못하는듯 하다.
그리고, 또한 이 학습자료에서 시원설들,,,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일일이 그 모순들은 지적하긴 장문이라야되겠는데, 그보다 위에서 평창도 같은 가사가 있었다는 역순으로도 모든 시원설들을 역순으로 대입하여도 그 집합체가 살아 있어야 하나 모두들 모순에 걸려 넘어지는 이야기들 뿐이다.
어쩜 아리랑에서 시원을 찾는 일은 우매함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대 언어가 탄생시 가락과 가무도 함께 하였으리라. 그러기에 아리랑은 스스로 먼저 태어난 언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이야긴가 하면 고대사회에서 즐거움이나 어떤 연고로 노랫소리로 아리랑이란 낱말이 제 스스로 먼저 불리워저 탄생하였슬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구한말 궁중에서부터 불리워진 아리랑은 아마 그 이전에도 맥은 흐르고 있었어야 전국적 확산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이 아리랑이 문화의 교류에 유행처럼 사라지고 다른 문화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지만 언젠가 영, 평, 정(영월, 평창, 정선)에 들어온 아리랑은 이 지역이 오지라 , 정선은 외지로 나갈려면 백봉령, 칠족령, 성마령등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외지와 교류가 별로없어 문화적 수입이 없어서 아리랑이 사장되지 않고 희석되지도 못하며 그래도 유지되어 전래되었던 것이지, 이 지방에서 아리랑이 발생하고 전국으로 확산될려면 타 문화와 충돌및 교류로 굴절로 반전될 수 있기에 이러한 주장은 김일성의 땡깡보다 더 억지라 하겠다.
물론 그 아리랑 지도서의 설명에 평창출신자가 정선 아리랑을 원산가서 유행 시켰다는등 이야기는,그것으로 모든 것을 전부 포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정선 아라리는 평창아라리와 한 지역의 한 장르의 아라리에서 출발했다는 역사까지 속인단 말씀입니까??
김일성보다 더한 억지 이론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게 아니라 주입 시킬것이란 느낌에,,,
억지 이론들,,, 정선교육청,,,,그만 웃깁시다.
왜 이리 욕을 하냐구요...
문화는 우리의 선조의 삶이고 또한 시대정신인데 이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 아닙니까?
왜 이렇게 아리랑이 왜곡되는가 하면,이론자들은 특수한 소양의 전문가도 아니고 이 이론의 검증도 없는 상태로 무조건 책을 만들어 정당화 하려는 크나큰 괴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하자.
8-90년대에 평창군은 스키장 등 겨울 레져 회사들로 지방세수가 짭질하여 제반 관광에 별 신경을 안 쓴 편이다. 그런데 정선, 영월은 탄광경기가 지난 후 별 세수원을 찾지 못하니 영월에서 동간댐을 반대하고 이로 인하여 동강탐사의 관광이 힛트치게 되었다.
하루 약 만오천명의 관광객이 동강을 다녀 간다는데,,, 이들은 이에 힘입어 영월 문화원장이 학계에 보고하여 인정받은 김삿갓 묘 하나로 상동면을 김삿갓 면으로 발전 시켰고 고씨동굴도 언젠가 다리를 놓았다.
고씨동굴의 유래에 나의 직계 조상님들이지만 나는 다리보다 배를 타고 가야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슬 것이란 불만도 있지만 영월은 단종문화와 동강, 김삿갓면 관광이 주를 이루어 지방세를 꾸려 나갔다.
또한 이에 불만은 고씨동굴의 유래에 당사자 고종원 형제들과 특히 셋째인 고종경은 평창으로 압송되어 형행되었다면 그는 의병장 대열에 올라야 하는 것인데, 영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은 전혀 못하는듯 하다.
(나의 글 "고씨동굴과 미완의 의병장" 편을 참고 바랍니다)
그러면 정선은??
정선 아리랑이 위의 이러한 어거지로 강원도 무형 문화재로 등록 되었다.
여기에 추가할 수 있는 물건들이 없다. 이를 찾다 보니 정선 5일장과 기차역등 옛 시골 정취의 서정이 아리랑과 매치를 잘 이루어 발전해 나가는데...
뗏목 아리랑의 한 부분 2기 뗏꾼들이 한해도 댓명이 죽을 수 있는 황새여울과 이런 죽음을 무릅쓰고 어라연을 넘어 영월 덕포의 종점까지 뗏목을 몰고 갔슬때 그 희열과 떼돈을 번 그 기쁨으로 목을 축이던 만지산 전산옥이네 주막(주막 이름도 없어 자기 이름을 내 걸고,,)도 정선 봉양리에 재건하였으며 전산옥 주모도 선발전을 갔는 어찌보면 돌멩이에 체이고 말 이런 미소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벤트로 역어내는 정선에서 아라리의 온갖 모든 현안에 너무 치중하다보니 과실도 있게 마련일테지만,,,
그러나 그것이 역사의 기록도 없는 단언이라든가 왜곡으로 어찌 눈가림을 할 수 있슬까??
역사란 현실을 이해하고 또한 똑같은 우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배운다는데, 이 역사가 왜곡되었다면 우리는 정선아라리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즐길 것인가??
결론으로 600년전 당시 고향으로 숨어오던 전오륜외 6인은 마흔이 안된 삼십대들로 그들이 정선에서 수십년 살았단 기록도 없다. 일부의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 가사는 청옥산 일대의 한치뒷산등에서 나무를 뜯으며 아라리의 가락이 왕성히 계승 발전되어오던 청옥산 일대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전오륜등의 이야기에서 것으로 만수산을 차입한것으로 유추 해석 하는 것이다.
이로서 만월대에서 날라오는 검은 구름이 높은 청옥산 산마루에 걸려 눈이 될지 비가 될지 애뜻한 사연을 담고있는 이 아라리는 이 가사가 정선이라기 보다는 미탄 청옥산으로 봐야 하는 것괴 이 가사는 전오륜등 거칠현동 7현이 만든것이 아니라 그 이후 미탄일대의 화전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불리워 진 것이다.
이것이 "만수산" 가락의 아라리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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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세는 후일 경노당에 가게 되면 고도리치는 노인네들에 등을 돌리고 돌아앉아 이 평창아라리와 아리랑의 재 해석의 광범위한 생각의 글을 쓰려던 것을 아리랑의 이해의 순서와 상관없이 나의 아리랑의 이해의 글을 계속 쓸 것입니다.
물론 나의 글들이라도 검증이나 이런것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오류가 심하고 또한 역사에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흔한 것입니다.
그 예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에 당간 지주가 있는데 당간은 아마 일제넘들이 대동아 전쟁의 철로 사용하려 압수한 듯하나 스님들을 울 나라의 한문을 제일 잘 하는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들은 당간에 대하여 지금 단 한줄의 기록도 없는 것 입니다.
이렇듯 아리랑에 그 역사적 증거를 찾으려 하는 우매함보다는 이 후세는 그 증거의 부분집합이 아닌 진 부분 집합들의 모순되지 않는 가상의 생각의 이해로 아리랑을 유추 해석하는 것 입니다. 저는 많은 것을 아직 알지는 못하나 숨쉬는 동안 끝까지 모든 아리랑의 재 해석을 할 것입니다.
죠크를 안 하면 목에 가시가...
써(존경하는) 처칠경, 링컨, 케네디, 레이건, 후세백작
이들의 공통점은 시도 때도 없이 죠크를 하는 것 입니다.
그럼 작별의 조크하나
송곳 찌른 구멍보다 더 작은 후세가 지금 바로 이 죠크로 이 세기의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한점... 궁민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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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3
정선 아리랑에 이 "만수산"의 가사가 역사적으로 가장 옛것이라는데..그래서 그를 원조라 하는데,,, 원조란 뜻도 모르며...
윗 글에서 이해를 하기전에 이"만수산"의 가사를 전오륜등 6인의 7현이 불렀단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두문동이고 뭐고는 그들의 억지 주장이지 아라리를 불렀단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만수산" 이라는 아라리 가사에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에 이색과 이색의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정선 아라리의 이론적 배경에 왜 꼬리를 다는지 알수 없다.
"만수산"이란 가사를 전오륜등이 불렀다는 역사적 기록도 없이 단어하나 가사에 나왔다고 그런 논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리랑에 대한 근본적 성격을 흐리는 사례이다.
위에서 이해하면 맞지도 않는 역사적 가식의 이론으로 점철된 정선 아리랑은 분명 아리랑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이다.
나의 논지에 아라리(아리랑)은 민초들의 자기 삶의 일상의 가사들로 일차적 서정성이란 한계를 넘는 가사는 없다는 것이다.
천오백수 아리랑을 모조리 뒤져 보아도 서정이 아닌 서사적인, 역사적 스토리나 이지적인 고차적 철학은 전혀 없다.
만수산 가사가 다만 후일 ,, 500년 후라도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만수산의 애뜻한 사연이나 나의 글에서 처럼 나물 뜯으러 청옥산에 올라서 검은 구름이 눈이 될지 비가 올지 이 애뜻한 심정이 만수산의 애뜻한 구전 이야기에서 애뜻한 마음의 가사차입이라고 본다면 ...실증은 없지만 앞뒤가 맞는 이해가 아닌지??.
아리랑 가락은 서민들의 애환이지 아리랑 가사에 만수산이란 단어 하나 들어갔다고 아리랑에 고려 충신들의 역사적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은 아리랑의 1차적 민초들의 서정성을 파괴하는 큰 실수인 것이다.
그것은 아리랑 전 가사를 보아도 아리랑 가사들은 전혀 역사적 사건을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리랑의 뜻을 단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할 지라도 아리랑에 가장 축적된 의미로 우리민족의 정서의 기조는 恨이다.
이 恨을 표출하는 단어는 단적으로 한 단어로 표현하면 아리랑인 것이다.
이렇게 아리랑은 순수하게 민초들 스스로의 삶의 애환을 그린 것이다.
학자들은 아리랑에 무얼 연구했고 무엇을 논하는지 묻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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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1
미탄의 평창 아라리 보존회원 여러분의 진심과 열심으로 지금까지 이룬 성과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평창아라리가 세계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또한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
세계인에 보여줄 수 있는 세계적 스토리로 만들기에 모든 경주를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이에 맞는 평창아라리 들(공원)을 조성하고 우리 평창역사의 삶을 보존하고 자랑할 문화적 공간의 발돋움이 있어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은 단순히 스포츠의 제전만은 아닙니다.
세계에 평창을 보여 주어야 할 때 입니다.
이 평창 아라리는 가락이기 이전에 평창인들의 삶 그 자체이고 얼굴 입니다.이것이 곧 우리의 평창문화의 일번지이기에 이를 세계화하여야 할 것이란 점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도 만들어야 하며 세계인들이 평창을 보아줄 수 있는 場도 마련함이 좋으리라 생각 되어 집니다.
앞으로 평창군과 평창 문화원은 이곳 미탄에 평창아라리 문화원을 발족하심도 마땅하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미탄의 평창아라리 보존회원님들은 이 점에 건의도 부탁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후세백작 2013.12.07 17:04
평창, 정선 아라리 가사 중에 하나로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에 대한 일반의 생각과는 전혀 상반되는 나의 이해의 글을 쓴다.
위의 가사는 위치적 공간 파악과 역사적 시간대를 찾아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사이리라.
그러나 이 후세백작은 그런 편류의 생각과는 상이한 점을 아래에 서술함에 누구든지, 또는 어느 아리랑 연구가이라도 이견이 있다면 제시 바랍니다.
위 가사가 정선 아라리의 시원설로 굳혀지는 것엔 정선교육청의 아리랑 지도 자료 "정선 아리랑"에서 위 가사가 정선 아리랑의 시원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600년 전 조선 개국 시 고려 유신들중 이초가 중국으로 귀양가서 자결 후 이초의 문하생 7명이 전오륜의 고향인 정선 두문동으로 낙향하여 여말 임금에 대한 애뜻한 충심으로 불렀다는 아리랑이라고 결론 맺으며 현존 아리랑 중 최고(最古) 상한대의 시원 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의 편견에 후세백작의 辨을 달아 보기로 한다.
과연 정선 교육청의 이러한 주장에 그들이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기에 지금 "만수산"이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 600년 전 그들 임금님을 사모하며 불렀다는 주장이 역사로 인정되는 이러한 愚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을 찾아서"에서 오대산에 은둔한 이색의 글들을 사료로 시원설을 유추하지만 이 점의 이해는 다음에 논하기로 한다.>
역사란 그 자체기록이 없으면 그는 역사로 기록할 사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선 아리랑의 시원은 위 가사의 "만수산~'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매우 억측으로 역사 소양에 아둔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만수산'이라는 아라리의 가사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 단어의 가장 첫째로 역사 사실의 확인으로, 고려 말에서 이조 초기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개국파들은 이미 정몽주도 죽였고, 2차 왕자의 난에 이성계 후실 강씨 부인의 아들들인 두 왕자도 죽인다. 이후 방원은 술집에서 "이직"과 대작하던 "정도전"을 그 자리에서 참살을 한다. 무론 표전문의 화근이 구실이겠지만..
또한, 이 초는 다시 중국으로 귀양 가서 자결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동향 정선 출신의 후학인 전 오륜을 위시하여 일곱 명의 문하생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멀리 숨어야 했다.
이 위기의식이란?? 일반적으로 귀양을 보내고 사약이 따라붙는 패턴의 과정으로 즉시 처형하는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반 저항을 없애고 처형을 하는 과정이다.
스탈린 시대에 트로츠키. 말렌코프는 멕시코등지로 망명을 갔으며 그 일년 뒤 권총이 뒤 따랐듯이 당시, 이 시기는 조선 개국 후이라도 혁명 과도기라 방원은 반혁명이나 조선 개국에 반하는 사례들에는 만약 조선의 개국혁명이 실패로 끝날 경우 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가 봐 조선 역성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누구든지 이에 반하는 자는 정도전의 참수에서 보듯, 바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무서움 그 자체였슬 것이다.
물론 이 죽림칠현의 선비들도 그러한 상황인식을 하였기에 피난길에 오른 것 아닐까??
이러한 혁명 과도기에 고려 유신 일곱명이 집단으로 전 오륜의 고향 정선으로 내려오기까지...아리랑을 부르며 곧바로 내려 왔다면 그 소문은 쉽게 방원의 귀에 들어갈 수가 있었고 방원이 알았다면, 이는 후일을 도모하는 역적의 집단으로 판단하고 그 즉시 단칼에 처치하였슬 것이다.
방원은 태종으로 재임시 세종을 데리고 평창까지 강무행사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사냥을하며 섭렵을 하는 극기훈련)로 두 번이나 다녀갔다 한다. 이때 두문동에 죽림 7현이 기거한다는 소스를 주는 자가 생기지나 않을까??
아니면 아직 이 시기에도 그들은 피신치 않은 상태였슬까??
아마, 죽림칠현은 이초가 중국서 자결후보다는 정도전을 술집에서 참수 후 생명에 더한 위협을 느꼈슬 것이고 이후 시간대에 낙향을 하였던 것 아닌가 하는 추정도,
여말 조선 개국의 혼돈의 시기에 전오륜이 고향땅 정선이 산간오지라고 동료들을 데리고 갔다면 이를 낙향으로 볼 수 있슬까?
아마도 방원의 눈에는 반 혁명동지로 와전돼 보일 것이기에 죽림칠현의 선비들도 그렇게 무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칩거하였듯이 죽림칠현도 처음엔 세상을 뒤로하고 깊은 산중으로 숨어 버렸슬 것이다.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그토록 죽이지 말라던 정몽주도, 정도전도 죽이는 이러한 공포정치 가운데 죽림 7현은 모두 정선으로 낙향하여 도연명처럼 귀거래사나 읇조렸을 것 처럼 만수산 가사의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행복했슬 시간은 아니란 점이다.
이들은 지금 서울서 정선은 불과 3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이지만, 아마 1~20년 후 즉, 세종 때나 아니면 아주 안정적 시기는 성종 때일 수 도 있는 것이다.
세종 초기까지는 조선 개국이 20년 되어 가능한 시간대이다. 성종 때는 이미 한세대가 지나간 시간대일 것이고 그럼 그때까지 이들은 숨어 살았슬까??
위 역사를 잠시 볼 때 그들은 바로 정선 두문동으로 낙향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으로 들어 갔듯이, 전오륜이 한양을 다니며 잘 알고 있었슬 듯한 먹거리도 많은 깊은 산은 미탄의 청옥산이란 점이다. 그들은 방원의 개혁 주도세력에 대항하지 못하기에 이곳, 오지의 산속인 청옥산에 잠적했지 않았슬까??
이 청옥산 해발 1,200m의 고지이지만,여타 산과는 다르게 육백 마지기라는(180,000평) 고원으로 산나물이 지천으로 나며, 토양과 기후도 좋아 화전민이 기거하기에 용이한 산세란 점이다.
또한 사방이 트인 오지라 도망가도 어느 방향인지 모를 정도로 지형적으로도 용이한 지점이다.
여기서, 그들이 정선 전오륜의 고향으로 바로 가지않고, 방원의 서슬퍼런 탄압에 처음엔 깊은 산으로 숨어 들어갔슬 것이고, 이후 시기가 완화되어 정선으로 귀착하였을 것이기에, 그들이 부른 가락이 있다면 노래의 배경무대는 평창에서 정선 사이에 걸쳐야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 가사를 보면은,,,""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라는 가사는 송도의 여말 임금님이 계신 만월대 뒷산에 구름이 막 모여 임금님에게 비를 뿌린다는 해석은 문체나 문장의 대상자 또, 시제나 문법, 어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왜냐면 이 가사는 지금 현재를 이야기 하지만 전오륜등의 두문동에서 개성을 보고 절을 하고 하는 것이 당시 상황은 아닌듯한 것이다. 먼 후일 두문동을 찾아 들어간 후의 일일 것이다.
강원도 산간오지에 사는 사람들이 송도의 만수산에 검은 구름이 모이는지 어떻게 알까??
그러면 이를 주객을 바꿔서 보기로 하자, 즉 정선에 비가 올 등 눈이 올등 만수산에서 검은 구름이 나에게로 막 몰려 든다.
이 노래 부를 때 검은 구름이 내 머리 위에 몰려오는데 그 구름이 만수산의 검은 구름일까?? 이러한 가사가 전오륜등 거칠현동 7인의 선비들이 정선에서 임금님을 사모하여 부른 아리랑 가사입니까??
이 가사는 전오륜등 7현이 정선의 거칠현동에 은거하면서 임금님을 사모해서 부른 노래가 아니다.
이 가사에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이야기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자칭 아리랑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를 현존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에 불리우던 아리랑으로 정선 아리랑의 기원설에 적용하는데 이의가 없었다면 이는 큰 오류이고 그 이전에 아리랑의 정체성에 괴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정체성의 괴리를 갖는다는 이야기는 아리랑은 민초들의 삶의 애환의 서정적 표출의 가사들로 한정되어있지 역사의 서사적 내용의 가사는 전무하다, 그런데 유독 이 "만수산" 아라리가 나물 뜯을 때의 표현이라면 서정적이지만 임금을 그리는 역사적 사건을 표현하면 서사적이기 때문에 아리랑 가사 전체에서 유독 이 가사만 서사적으로 돌출되는 모순을 가진다.
그럼 이 가사를 아래에서 다시 이지적으로 분해하여 보자.
이 문장은 만수산에 있던 검은 구름이 청옥산 높은 곳에 걸려서 눈이 될지 비가 될지 구분이 안 된다는 이야기로, 만약 이 구름이 구릉 아래에 실오라기 같은 산간의 하늘에서 구름이 비가 될지 눈이 될지의 가사는 맞지 않는다.
고원인 청옥산 산마루에 구름이 걸쳐서 비가 될지, 눈이 올지 알 수 없다는 표현이다.
이를 확증해 보기 위해선 5월쯤에 평창의 높은 산에 올라 (입탄고개나 유동리 고목나무쯤에서 보면 ,,, 동쪽의 가장 멀리에 있는 청옥산 정상엔 간밤에 마치 킬리만자로의 눈 사진처럼 정상부가 하얗게 눈이 내린 산을 볼 수 있다.
그때까지(눈이 내리지 않은 평상시기엔,,) 청옥산은 뾰족한 봉우리가 없으므로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4-5월에 나물뜯으로 산에 올라서 검은 구름이 비가 될지 눈이 될지 모르는 이러한 곳은 평창, 정선 사이에 이곳뿐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춘궁기인 봄철에 봄나물 뜯어 끼니를 연명하려고 청옥산에 올라 갔슬 때 갑자기 검은 구름 몰려오고 날이 흐려지자 해발 1,200m의 고지라 그 구름이 바로 비가 되어야 할 봄철에도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알 수 없다는 가사이지 이 가사가 전오륜등 거칠현동에서 은거하며 임금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충절의 노래는 전혀 아니란 점이다.
만약 충절의 노래였다면 이런 류의 가사가 아니라 사모하는 뜻의 단어가 포함되었어야 할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 가사는 조선 창업을 반대한 고려말 유신(遺臣)인 전오륜등 죽림7현이 정선 땅으로 가기엔 미탄을 지나야 했고 혹, 그들은 정선 두문동으로 가기 이전에 백이, 숙제가 수양산에 칩거했듯이 먹거리 많고 산간오지인 미탄의 청옥산에 칩거하다가 이조가 중앙 집권화의 안정적 시기로 접어들며 칠현이 두문동으로 가고 옛 임금을 향하여 충절의 의표도 나타냈더라면, 당 시기 이후에 민초들이 봄나물 뜯으러 이 산에 오를제 검은 구름이 막 몰려들어 나물도 못 뜯고 피할 곳도없는 애틋한 심정일텐데 이 애틋한 심정의 뜻을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 지방 옛 설화에서 "만수산"이란 단어를 차입했던 것이다.
이런 예로 볼때, 해발 1,200 고지의 바로 이 청옥산만이 검은 구름이 비가되고 때로는 눈이 되는 곳이기에 이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는청옥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으로 청옥산 아래 화전민들의 거주지역인 두만이 마을은 산간 오지로 지난 7-80년대 까지에도 미디어나 외래인 교류도 없는 오지로서 그로 인해 아라리(이 지역 산간의 아리랑)은 독창적으로 전래되며, 또한 그 가사수가 늘어간 지역으로 지금 정선 아리랑에서도 평창군 미탄면 일대의 지역적 가사가 제일 많아 포함되어 있듯이 청옥산 아래의 두만이 마을은 이 지방의 아리랑의 보고였으며 지금도 이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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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기원설에 아리랑은 자연 발생적이기에 원조나 시원은 찾을 수 없다.
고대로부터 민초들이 삶의 애환을 달래려 부르던 가락이기 때문에 이는 고대인들의 시대에 인간 본연의 감정의 발생의 자연 발생적으로 보아야 하며, 그러기에 아리랑이란 그 가사가 어느 목적이나 정치적 사건의 비애등의 특유의 객체적 사건의 미화도 아닌 일차적으론 자기 자신의 세계에 국한되는 가사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가사와 단어들이 구전으로 수천 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일차적 자신의 세계라 함은 아리랑은 서사적이거나 객관적 내용의 뜻은 전혀 없다.
즉, 역사적 사실이라든가, 어떤 사건에 대한 염원의 기원등 이러한 내용은 전혀없고 민초들의 서정성을 지닌 풍부한 삶의 희노애락의 표출이다.
또한 민초들의 가사이지 사대부나 양반들의 가사도 없기에 그들 기득권 세력이 아닌 민초들의 삶의 표출로 승화되는 가사들의 노래인 것이다.
여기에 "만수산 검은 구름 막 모여 드네'란 가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기에 이 가사가 여말 전 오륜등의 유생들이 부른 노래가 아닌 것이다. 이런고로 가사도 시원을 600년으로 올려 잡을 수 없다. 그러한 기록도 없고 그러한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정선 관계자들은 정확한 기록을 제시하여야 하며 전오륜이 파직을 당하고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정선으로 가서 썼다는 "두문동 실기"란 책에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가??
정선 사랍들은 이 책과 전오륜과 만수산 아리랑 가사를 하나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아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주물러서 역사의 정체성을 왜곡시키는 정선사람들에게 나는 아리랑의 보편성과 타당성의 왜곡에 대한 실망이 크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바 매천야록에서 서술된 기록이며 또한, 역사적 서술의 기록성에 가장 접근한 문헌은 헐버트의 아리랑 기록에 가장 역사적 사료를 볼수있는데, 궁중에서부터 19세기 초 우리의 아리랑은 전국에 다시 유행 붐을 이루었슬때 이 가사가 화전민들 사이에서 봄나물 뜯으러 높은 산에 오르다 금새라도 쏟아부을 듯한 먹구름이 비가 될지 눈이 될지 알 수 없어 그 조급하고 애뜻한 심정을 표현하고자, 이 동네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여말의 이야기에서 "만수산"이란 단어의 뜻이 같은 애뜻한 심정이기에 이 단어를 아라리 가사에 차입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리랑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이야길 하지만 그것은 학자의 연구와 그에대한 검증을 거치는 학문적, 객관적 자료는 아니다. 오늘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후일엔 그것이 정설로 정립되는듯 하지만 역으로 환산해 보면 모두들 가설뿐이란 점이다.
* 헐버트의 논문중에는 한글이 영어보다 대중 의사소통이 우수하다고 결론지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아리랑에 모든 사람, 모든 감정이 쉽게 동화되는 부분의 이해도 아닌가 추정해 본다.
만약 역사적 사건이 아리랑에 반영 되었다면, 영서의 이 고장 일대 즉, 영월,평창,정선 일대의 아리랑속엔 이 지역에서 일어난 단종의 비애가 수십 가락은 족히 될 것인데 그에 대한 단어는 한점도 찾을 수가 없다. 또 나아가서 아마 구한말 당시에 일제의 강점과 고종황제의 하야등 우리의 국운이 멈추는 듯한 비애에도 한 줄의 가사도 없는 것이다.
아리랑은 이렇게 철저하게 서정적인 자기자신을 위한 가사로 스스로의 한탄속에서도 흥을 돋우는 이야기이지 결코 임금을 그리는 등 서사적 이야기는 전혀 아닌 것이다.
참으로 정선 아리랑 이론자들은 아리랑 발상지가 정선이라며 이러한 아리랑 자체의 의미도 모르며 그것을 정설이라 떠들고 있다.
(지금 나의 이 말이 남을 멸시하는 모순적인 생각이라면 언제던지 댓글로 이 모순점을 파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려말 전오륜등 유생들이 혹 "만수산 검은구름~"가사의 아리랑을 불렀다손 치더라도 민초들이 그 노래만 구전으로 600년 이어져 오지 않았다는 관점이다. 왜냐면 이러한 역사성 노래를 인식하였으면 이후 다른 역사 가사들의 아리랑이 수십곡 번성 하였슬 진데 오직 그것만 구전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민초들의 아리랑 가사를 보면 그들 스스로의 창의성과 해학성, 풍자성이 넘쳐 나는 것의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이 가사를 여말 임금님에 대한 애뜻한 심정으로 선비들이 불렀다면 민초들의 아라리에선 의미가 없는 가사가 될 수 있슬진데, 민초들이 나물 뜯다가 흐려진 날씨에 이 검은 구름이 비가 올까 눈이 올까~~라는 생각에 만수산 단어를 차입하여 만수산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자기만족의 가사가 되는 것이다.
즉, 아리랑은 스스로의 문제에 한탄등의 반어로 자가도취, 자기만족의 결과를 바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정선 아리랑에 시원을 이 만수산이란 가사로 잡고 600년전의 역사를 들먹이며 정선 아리랑은 600년이 되었다며 또한 더욱 웃기는 것은 이 "만수산' 단어 하나의 차입이 둔갑되어 아리랑 전체의 시원으로 잡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정선아리랑 지도자료 "정선 아리랑"의 222쪽중 8P에는 참으로 해괴한 논리를 펴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아리랑 문학연구,1990 P 192】
이 논리는 정선 아리랑이 아리랑의 시원으로 한가닥은 평창으로 전래되어 횡성 경기 서울로 퍼져나가 서울, 원산,대구, 부산 심지어 울릉도까지 퍼져 나갔으며, 또 한지류는 영월, 충주, 춘천, 밀양, 부산으로 그리고, 세번째는 삼척으로 진출하여 함흥, 영남지방까지 확산되었다는 이론이란다.
이 논지를 누가 옳다고 인정해 주리오만은...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세뇌시키는 교육이란 참으로 무서운 장난이기에 정선교육청은 그러한 논지의 교육을 당장 걷어 치워야 한다.
영, 평, 정은 한 바운더리의 동일성 공간으로, 하나의 문화권역 내에서 하나의 장르의 동일가사와 가락으로 이루는 동일문화권이였는데 영월은 그래도 외부와 저촉으로 인한 것으로 중화되고 말소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창과 정선지방엔 약 일천 오백수의 거의 같은 아라리 가사가 전래되고 있다 한다.
그런데, 정선이 시원이고 한양까지 퍼져 나갔다는 이론은...귀신이 나락은 까 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이론은 맞지 않는 것이다.
그 이론이 맞지 않음은 스스로의 이론에서도 모순점이 파악되며, 만약 한양이든 부산에서 정선 아라리처럼 꼬리가 없는 아라리는 조금도 유행을 타지 못하는듯 하다.
그리고, 또한 이 학습자료에서 시원설들,,,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일일이 그 모순들은 지적하긴 장문이라야되겠는데, 그보다 위에서 평창도 같은 가사가 있었다는 역순으로도 모든 시원설들을 역순으로 대입하여도 그 집합체가 살아 있어야 하나 모두들 모순에 걸려 넘어지는 이야기들 뿐이다.
어쩜 아리랑에서 시원을 찾는 일은 우매함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대 언어가 탄생시 가락과 가무도 함께 하였으리라. 그러기에 아리랑은 스스로 먼저 태어난 언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이야긴가 하면 고대사회에서 즐거움이나 어떤 연고로 노랫소리로 아리랑이란 낱말이 제 스스로 먼저 불리워저 탄생하였슬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구한말 궁중에서부터 불리워진 아리랑은 아마 그 이전에도 맥은 흐르고 있었어야 전국적 확산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이 아리랑이 문화의 교류에 유행처럼 사라지고 다른 문화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지만 언젠가 영, 평, 정(영월, 평창, 정선)에 들어온 아리랑은 이 지역이 오지라 , 정선은 외지로 나갈려면 백봉령, 칠족령, 성마령등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외지와 교류가 별로없어 문화적 수입이 없어서 아리랑이 사장되지 않고 희석되지도 못하며 그래도 유지되어 전래되었던 것이지, 이 지방에서 아리랑이 발생하고 전국으로 확산될려면 타 문화와 충돌및 교류로 굴절로 반전될 수 있기에 이러한 주장은 김일성의 땡깡보다 더 억지라 하겠다.
물론 그 아리랑 지도서의 설명에 평창출신자가 정선 아리랑을 원산가서 유행 시켰다는등 이야기는,그것으로 모든 것을 전부 포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정선 아라리는 평창아라리와 한 지역의 한 장르의 아라리에서 출발했다는 역사까지 속인단 말씀입니까??
김일성보다 더한 억지 이론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게 아니라 주입 시킬것이란 느낌에,,,
억지 이론들,,, 정선교육청,,,,그만 웃깁시다.
왜 이리 욕을 하냐구요...
문화는 우리의 선조의 삶이고 또한 시대정신인데 이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 아닙니까?
왜 이렇게 아리랑이 왜곡되는가 하면,이론자들은 특수한 소양의 전문가도 아니고 이 이론의 검증도 없는 상태로 무조건 책을 만들어 정당화 하려는 크나큰 괴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하자.
8-90년대에 평창군은 스키장 등 겨울 레져 회사들로 지방세수가 짭질하여 제반 관광에 별 신경을 안 쓴 편이다. 그런데 정선, 영월은 탄광경기가 지난 후 별 세수원을 찾지 못하니 영월에서 동간댐을 반대하고 이로 인하여 동강탐사의 관광이 힛트치게 되었다.
하루 약 만오천명의 관광객이 동강을 다녀 간다는데,,, 이들은 이에 힘입어 영월 문화원장이 학계에 보고하여 인정받은 김삿갓 묘 하나로 상동면을 김삿갓 면으로 발전 시켰고 고씨동굴도 언젠가 다리를 놓았다.
고씨동굴의 유래에 나의 직계 조상님들이지만 나는 다리보다 배를 타고 가야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슬 것이란 불만도 있지만 영월은 단종문화와 동강, 김삿갓면 관광이 주를 이루어 지방세를 꾸려 나갔다.
또한 이에 불만은 고씨동굴의 유래에 당사자 고종원 형제들과 특히 셋째인 고종경은 평창으로 압송되어 형행되었다면 그는 의병장 대열에 올라야 하는 것인데, 영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은 전혀 못하는듯 하다.
(나의 글 "고씨동굴과 미완의 의병장" 편을 참고 바랍니다)
그러면 정선은??
정선 아리랑이 위의 이러한 어거지로 강원도 무형 문화재로 등록 되었다.
여기에 추가할 수 있는 물건들이 없다. 이를 찾다 보니 정선 5일장과 기차역등 옛 시골 정취의 서정이 아리랑과 매치를 잘 이루어 발전해 나가는데...
뗏목 아리랑의 한 부분 2기 뗏꾼들이 한해도 댓명이 죽을 수 있는 황새여울과 이런 죽음을 무릅쓰고 어라연을 넘어 영월 덕포의 종점까지 뗏목을 몰고 갔슬때 그 희열과 떼돈을 번 그 기쁨으로 목을 축이던 만지산 전산옥이네 주막(주막 이름도 없어 자기 이름을 내 걸고,,)도 정선 봉양리에 재건하였으며 전산옥 주모도 선발전을 갔는 어찌보면 돌멩이에 체이고 말 이런 미소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벤트로 역어내는 정선에서 아라리의 온갖 모든 현안에 너무 치중하다보니 과실도 있게 마련일테지만,,,
그러나 그것이 역사의 기록도 없는 단언이라든가 왜곡으로 어찌 눈가림을 할 수 있슬까??
역사란 현실을 이해하고 또한 똑같은 우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 배운다는데, 이 역사가 왜곡되었다면 우리는 정선아라리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즐길 것인가??
결론으로 600년전 당시 고향으로 숨어오던 전오륜외 6인은 마흔이 안된 삼십대들로 그들이 정선에서 수십년 살았단 기록도 없다. 일부의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 가사는 청옥산 일대의 한치뒷산등에서 나무를 뜯으며 아라리의 가락이 왕성히 계승 발전되어오던 청옥산 일대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전오륜등의 이야기에서 것으로 만수산을 차입한것으로 유추 해석 하는 것이다.
이로서 만월대에서 날라오는 검은 구름이 높은 청옥산 산마루에 걸려 눈이 될지 비가 될지 애뜻한 사연을 담고있는 이 아라리는 이 가사가 정선이라기 보다는 미탄 청옥산으로 봐야 하는 것괴 이 가사는 전오륜등 거칠현동 7현이 만든것이 아니라 그 이후 미탄일대의 화전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불리워 진 것이다.
이것이 "만수산" 가락의 아라리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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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세는 후일 경노당에 가게 되면 고도리치는 노인네들에 등을 돌리고 돌아앉아 이 평창아라리와 아리랑의 재 해석의 광범위한 생각의 글을 쓰려던 것을 아리랑의 이해의 순서와 상관없이 나의 아리랑의 이해의 글을 계속 쓸 것입니다.
물론 나의 글들이라도 검증이나 이런것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오류가 심하고 또한 역사에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흔한 것입니다.
그 예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에 당간 지주가 있는데 당간은 아마 일제넘들이 대동아 전쟁의 철로 사용하려 압수한 듯하나 스님들을 울 나라의 한문을 제일 잘 하는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들은 당간에 대하여 지금 단 한줄의 기록도 없는 것 입니다.
이렇듯 아리랑에 그 역사적 증거를 찾으려 하는 우매함보다는 이 후세는 그 증거의 부분집합이 아닌 진 부분 집합들의 모순되지 않는 가상의 생각의 이해로 아리랑을 유추 해석하는 것 입니다. 저는 많은 것을 아직 알지는 못하나 숨쉬는 동안 끝까지 모든 아리랑의 재 해석을 할 것입니다.
죠크를 안 하면 목에 가시가...
써(존경하는) 처칠경, 링컨, 케네디, 레이건, 후세백작
이들의 공통점은 시도 때도 없이 죠크를 하는 것 입니다.
그럼 작별의 조크하나
송곳 찌른 구멍보다 더 작은 후세가 지금 바로 이 죠크로 이 세기의 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한점... 궁민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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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3
정선 아리랑에 이 "만수산"의 가사가 역사적으로 가장 옛것이라는데..그래서 그를 원조라 하는데,,, 원조란 뜻도 모르며...
윗 글에서 이해를 하기전에 이"만수산"의 가사를 전오륜등 6인의 7현이 불렀단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두문동이고 뭐고는 그들의 억지 주장이지 아라리를 불렀단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만수산" 이라는 아라리 가사에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에 이색과 이색의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정선 아라리의 이론적 배경에 왜 꼬리를 다는지 알수 없다.
"만수산"이란 가사를 전오륜등이 불렀다는 역사적 기록도 없이 단어하나 가사에 나왔다고 그런 논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리랑에 대한 근본적 성격을 흐리는 사례이다.
위에서 이해하면 맞지도 않는 역사적 가식의 이론으로 점철된 정선 아리랑은 분명 아리랑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이다.
나의 논지에 아라리(아리랑)은 민초들의 자기 삶의 일상의 가사들로 일차적 서정성이란 한계를 넘는 가사는 없다는 것이다.
천오백수 아리랑을 모조리 뒤져 보아도 서정이 아닌 서사적인, 역사적 스토리나 이지적인 고차적 철학은 전혀 없다.
만수산 가사가 다만 후일 ,, 500년 후라도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만수산의 애뜻한 사연이나 나의 글에서 처럼 나물 뜯으러 청옥산에 올라서 검은 구름이 눈이 될지 비가 올지 이 애뜻한 심정이 만수산의 애뜻한 구전 이야기에서 애뜻한 마음의 가사차입이라고 본다면 ...실증은 없지만 앞뒤가 맞는 이해가 아닌지??.
아리랑 가락은 서민들의 애환이지 아리랑 가사에 만수산이란 단어 하나 들어갔다고 아리랑에 고려 충신들의 역사적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은 아리랑의 1차적 민초들의 서정성을 파괴하는 큰 실수인 것이다.
그것은 아리랑 전 가사를 보아도 아리랑 가사들은 전혀 역사적 사건을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리랑의 뜻을 단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할 지라도 아리랑에 가장 축적된 의미로 우리민족의 정서의 기조는 恨이다.
이 恨을 표출하는 단어는 단적으로 한 단어로 표현하면 아리랑인 것이다.
이렇게 아리랑은 순수하게 민초들 스스로의 삶의 애환을 그린 것이다.
학자들은 아리랑에 무얼 연구했고 무엇을 논하는지 묻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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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1
미탄의 평창 아라리 보존회원 여러분의 진심과 열심으로 지금까지 이룬 성과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평창아라리가 세계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또한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
세계인에 보여줄 수 있는 세계적 스토리로 만들기에 모든 경주를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이에 맞는 평창아라리 들(공원)을 조성하고 우리 평창역사의 삶을 보존하고 자랑할 문화적 공간의 발돋움이 있어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은 단순히 스포츠의 제전만은 아닙니다.
세계에 평창을 보여 주어야 할 때 입니다.
이 평창 아라리는 가락이기 이전에 평창인들의 삶 그 자체이고 얼굴 입니다.이것이 곧 우리의 평창문화의 일번지이기에 이를 세계화하여야 할 것이란 점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도 만들어야 하며 세계인들이 평창을 보아줄 수 있는 場도 마련함이 좋으리라 생각 되어 집니다.
앞으로 평창군과 평창 문화원은 이곳 미탄에 평창아라리 문화원을 발족하심도 마땅하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미탄의 평창아라리 보존회원님들은 이 점에 건의도 부탁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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