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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의병장 고종경과 고씨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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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2-09 16:17 조회5,9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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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의병장 고종경과 고씨동굴]

후세백작 2010.11.08 09:25

아래의 글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평창 현감 남천 권두문의 "호구록<虎口錄>이라는 난중일기에 서술되어 있는 고씨동굴로 피난간 고종원 형제와 그의 아우 고종경이 의병을 일으키다 실패하여 평창으로 압송시킨 후 처형되는 장면들이다.

고종원의 <기천록>이 있다 하나 저는 아직 접하지는 못하였고 그 기천록은 고종원 형제의 당사자의 글이나 당시 임진왜란을 겪는 일지인 이 호구록 7장에 쓰여진 고종경 형제들 일부의 이야기는 3자적 입증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호구록 7장은 권두문 평창군수가 왜구에 잡혀 왜구들의 임시 강원도  원주의 강원감영에 수감되어 있는데 고종원 형제도 고씨동굴에서 잡혀 와 옥중에서 만남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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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호구록이란 인용글은 420년전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가 왜구에 의해 원주 감영에 투옥되며 고씨동굴에 피신하였다가 체포된 고종원 두 형제와의 해후에 의병의 책임을 지고 평창으로 압송하여 형행하라는 강원도백의 명에 따라 권두문 군수가 고종원 형제의 아우 고종경을 형행하고도 서로 위로하는 남천 권두문 군수의 임란 일기로 13장중 제 7장을 인용한다)

<虎口錄> 7장 南川 權斗文

萬歷 壬辰 8월 19일
낮에 영월 선비 고종원, 종길 두 형제가 잡혀 왔다. 먼저 내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공께서 어쩌다 그렇게 되셨소? " 한다.

나는 "평생에 악을 쌓은 게 많아서 부자와 함께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며 늙으신 아버지께선 올해 연세가 71세인데, 난리 통에 쫒기어 어디 계신 줄도 모르니 나는 속히 죽원이나 그렇게는 되어지지 않고 적의 칼날이 내 머리로 떨어질때 강녀가 몸으로 나를 덮어 나는 살고 그녀는 죽고 여기에 잡혀 온 후에는 내 아들 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늘까지 나를 죽이지 않았으나 내일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소"라고 했다.

고(高) 군이 이르되 "소무나 문산 같은 분이 다 악을 쌓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라 다 운명이로소이다" 공의 처지도 저와 비슷합니다.
저도 팔십 노부가 난리에 쫒기어 방금 산곡에 계시고 아우 종경이가 의병을 불러 모으다 비명에 죽고 내 처는 나를 살리려다 암굴에서 죽었으니 처지가 어찌 그리도 흡사합니까??"한다.

나는 말했다. " 영재(令第) 종경이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슬프기 한이 없고, 지금 생각하면 나의 과실이 적지 않다"하니 고 군의 말이 "내 동생의 죽음은 비록 애매하다고는 하나 본 읍(本邑)에서 구명( 求命)의 첩(牒)이 영문( 營門)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이미 형이 집행되었다고 하니 이 어찌 운명이라고 아니할 수 있으며, 공의 과실이라고 탓 하겠습니까? 한다.

고종원은 횡성 세족(世族 )으로 영월로 이거해 살다가 왜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그의 아우 종경이가 고향 마을에 통고해서 병사를 모으니 온 마을이 모두 종경이의 문무재주를 추앙해서 그를 우두머리로 삼아 의병에 참가하니 그의 향병(鄕兵)이 수백 명이라, 장차 홍천과 영춘 사이의 험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왜군의 진로를 차단할 준비를 하고 있슬 때였는데 도백이(지금의 도지사)가 찾아와 종경이의 의(義)가 가상타고 격려하며, 당시 흥원진(興原陳)이 약하다고 종경이가 모은 영군(營軍) 500명으로 흥원진을 도우라고 지시하고, 이 뜻을 흥원진에 알렸건만 영군이 중도에서 흩어지는 바람에 때를 놓치게 되었다.

흥원진장(興原陳將)이 이를 도 영문(道營門)에게 보고하니 영문에서는 종경이 군율을 범하였다고 체포하여 내가 근무한 평창으로 이송하여 그를 행형(行刑)토록 지시했다.

종경이 처음에는 구국일념으로 모병을 한 공과 의가 있다해도, 영문절제(營門節制)에 부진망진(赴陳亡陳)하여 때를 놓쳤으니 사형을 집행하라는 상부의 명이었다.

그때 마침 나도 관직을 겸하게 되어 군(郡)에 당도해 보니 평창 읍내 많은 사람들이 군청 뜰에 가득 모여 진정과 호소를 하는데 종경이는 가상한 의는 있슬지언정 죽일 죄는 없다고 하며, 영진(營陳)이란 것이 군진(軍陳)과는 달라 오늘 모였다가 내일 흩어진다 해도 종경이 사율(師律) 이 엄하지 못해 그런 것도 아니고 군(軍)의 신망을 잃어서 그런것도 아니며, 종경의 재주와 혈기는 가히 한 구석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나라가 위급할 때 죄 없는 의사를 죽인다면 원통하고 아깝다고들 하였다.

그때 마침 한양에서 평창으로 피난을 온 한산군 이축과 前 부사 윤면, 선전관 신경등, 교관 홍재식이 앉아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먼저 창의( 倡義)를 했으나 가위(可謂) 쓸만한 인물이니 석방을 하여 국가에 이롭게 함이 옳다" 하니 나도 이 뜻을 위에다 보고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오래도록 상부의 회신이 없어 수령의 도리로 윗 사람의 명을 어기며 오래토록 기다릴 수 없어 애석하긴 했지만 그의 형을 집행하였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한지 얼마 않되어 도백으로부터 종경에 대한 형을 정지하고 무죄 석방하라는 첩문(牒文)이 왔으니 놀랍고 아깝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애매하다" 한 점이 바로 이런 뜻이다 .

고 군이 내 아들 주를 보며 한숨 지우며 하는 말이, "충효의 가문에는 기가 반드시 통할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며 왜들도 해하지 못할 것이다""한다.

나도 대꾸하여, " 고 형(高兄)도 역시 이 나라 사직에 은혜가 있고 의병을 도우다가 이루지 못한 한을 안고 죽은 동생의 의가 형제간에 서로 통할 것이니 하늘이 만약 우리 부자를 도우신다면, 고 형 형제분들도 꼭 도우실 것입니다""하고 서로 위로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갔다.

나의 증조부 익장공(翼蔣公)을 생각하면 삼도(三道)의 감찰사(監察使)로 그 이름이 방방곡곡에 진동하여 왜구들이 스스로겁을 먹고 접근하지 않아 임금께서도 교지로 지용(智勇)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셨는데 이제 그 자손이 오히려 왜노(倭奴)에게 잡혀와서 땀을 흘리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하며 흐느껴 우는지라. 무슨말로 어떻게 위무를 해야 할줄 몰랐다.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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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강원도 영월에서 의병을 모아 왜구에게 대항한 고종원 형제에 대한 이야기로 강원도 영월군 진별리에 고종원, 종길, 종경 삼 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종경이는 자는 사근(士近), 호는 화수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10세손이며 안릉참봉(安陵參奉) 광후(廣後)의 3남으로 중종 33년(1588) 5월 18일 출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쳐들어와 계속 승리하며 북진하고 있었다. 그해 6월 26일 영남지방의 전병사(前兵使)인 김성일(金誠一)과 호남지방의 동래 부사였던 고경명(高敬命)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감격하여 도내 각읍에 통문(通文)을 돌려 군량(軍糧)과 병기주철(兵器鑄鐵)을 모으고 청, 장년을 소집하였다.

이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강원 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에게 그 솔선창의(率先倡義)를 가상히 여겨 관군 오백 명을 첨송(添送)해 주며 새로 모집한 관군 오백 명을 주어 흥원진까지 통솔해 가기를 명하였다.

(흥원진은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지역으로 일본군이 한양 공격의 주 루트에서 남한강을 건너 원주로 들어 온다는 예상의 남한강을 건너는 관문)

군사를 통솔하여 가는 도중 고종경은 관군의 도망이 심해 다시 군사를 모으고 이끄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서 제시간에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를 추포(追捕)하느라 기일을 어기게 됨에 도백은 종경의 지휘책임을 물어 그를 체포하여 평창군으로 이송 수감시켜서 행형을 할것을 하명하였다.

이때 평창에 피난 온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부사(前俯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申卿澄) 교관(敎官) 홍식(洪湜)등이 창의(倡義)인재임을 들어 사죄성공케 하려고 힘썼으며 권군수(權郡守)도 공의(公儀)로 사죄공문(赦罪公文)을 감영(監營)에 보냈으나 공문은 길이 막혀 전달치 못하게 되니 상사의 명을 지연시킬 수 없다 하여 행형을 하고 말았다.

참으로 애통 가석(哀痛可惜)한 일이다. 후일에 조정에서 명령전도(命令顚到)의 책임을 물어 도백은 파출(罷黜)되었다.

일부 도망친 군사들을 대신하여 강원 감사 유영길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군율을 어겼다고 해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월의 백성들이 “위급존망의 날을 당하여 무죄한 의사(義士) 한 명을 죽이는 것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사면을 요청했고, 군수 권두문이 이러한 사안을 원주 감영에 보고했지만 길이 막혀서 제시간에 가지 못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강원감사 유영길은 고종경을 사면한다고 하였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후였다.
유영길은 바로 파면당하였으나 영월 사람들은 고종경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는 의병에 참여하길 꺼려하여 모두 흩어져 버렸다.

여기서 정선은 왜장의 항복하라는 서신을 들고간 첨병에게 항복하고 왜병의 수중에 들어갔고, 8월 7일 평창에 왜병이 들어오며 9일에는 적장의 항복권유 서신을 가지고온 첨병 조선인의 목을 베어버리고 권두문 군수는 노성산에서 항전하라는 제사를 지내고 나아가 대항하여 싸웠지만, 평창에선 관군 70명을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 지원하고 남은 관군 60명 정도와 주민을 합해서 100여 명이 강원도를 향하여 철원, 김화, 고성, 강릉, 삼척을 거쳐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 영월,신림에서 원주로 향하여 원주 영원성(치악산성)에서 원주시장 김제갑 옹을 처형하고 승리하여 강원도를 장악하는 왜장 모오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는 쓰미즈 번의 왜구 4번대의 4,000명의 왜에 대적하기란 중과부적으로 노산성에서 후퇴하여 응암굴로 피신하였다가 응암리 전투에서 패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영월은 의병장 고종경의 처형에 따른 불만과 세 규합이 용이치 않자 영월은 싸움 한번 못하고 영월 고을을 내주게 되었다. (당시 영월은 혼미백산하여 군수가 부재로 없어 권두문 평창군수에게 고종경의 처형의 명을 내렸는데 시중에 권두문이 영월군수라는 인터넷 글들의 확산은 오류임을 지적한다)

8월 17일 적이 영월에 쳐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원은 가족을 이끌고 노리곡 (지금의 진별리 고씨굴) 석굴 안으로 피난했다. 다음날에 적이 영월까지 진입하여 남아 있는 농민들을 협박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던 고종원 형제의 숨은 곳을 알아냈다.
18일 왜군은 뗏목을 타고 진별리 강을 건너 노리곡으로 집결하여 피난민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노리곡굴 입구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고종원의 아내 조 씨 부인은 노리곡굴 안에 있는 연못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고종원 형제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 굴 밖으로 나와 포로가 되었다. 두형제는 모진 고문을 당해도 결코 투항하지 않았다.
굴 안에 불을 지펴 생포하려 하자 부인 조씨(曺氏)는 굴 안 벽상에서 투신자결 하였고, 계제(季弟)종길과 같이 잡혀 원주로 압송되어 목책(木柵)속에 수감되었다.

위의 호구록에 8월 19일 자 기록은 고종원 두 형제가 원주 감영에서 평창의 권두문 군수를 만나서 서로를 위안하며 앞날에 의(義)로서 앞날의 왜를 이겨나가자는 결의속에 권군수의 아들 주가 비밀리에 파던 탈출구를 이용하여 9월 1일 폭우가 심한 밤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여 권군수(權郡守)는 평창으로 무사히 돌아가고 형제는 영월로 가다가 단구역(丹邱驛) 근처에서 적에 잡혀 종길은 그 자리에서 죽고, 공은 요행이 방면돼 9월 6일 포로된 지 20일 만에 천신만고 끝에 영월에 돌아와 노친(老親)(71세)을 만났다.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기천록(祈天錄)이 남아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강원도 의병의 면모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고종경의 억울한 죽음과 당시 백성들이 전쟁에 임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대항하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이 피난했던 노리곡 석굴은 그 후 고씨굴(高氏堀)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하여 본다면 미완에 그친 고종경 의병장의 의병활동은 강원도의 골짜기는 왜병들이 이동통로라는 생각에 장차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영춘서 홍천까지 주 무대로 게릴라성 의병활동을 그린듯 한데. 강원도백의 명은 남한강에서 섬강으로 건너는 장호원 목계쯤의 앞에서 남한강을 건널 왜군을 원주 흥업면의 흥원진에서 적의 대군을 막으라는 명에 싸움 한번 해본 적이없는 의병들이 지레 겁부터 먹고 대열이 흐트러지기에 흥원진에 도착시간이 늦었던 것입니다.

이를 탓하여 의병장을 평창으로 압송하여 행형하라는 도백의 명령엔 의를 의로 받아주지 않아서 민의가 돌아서서 영월군은 현감이 잠적해 버리고 왜구에 대항 한번 못하고 왜의 손에 점령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의 생각으로는 윗글 호구록에 영진(營陳)이냐 군진(軍陳)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의병도 목숨을 조국에 바치고 나가 싸우는 군진이겠지만 그들의 인원과 무기 등의 특성과 성격을 파악하고 요소에 맞는곳에 배치를 하여야 효율적이란 점입니다.

윗글 호구록의 다음 장에는 영원성(원주를 사수하는 치악산성)에서 관군 4,000명이 왜군 3,000명에 패하고 원주 목사 김재갑의 목을 베는 일례에서 보면 관군은 성의 안쪽에서 아래로 향한 전투에서 3,000명에 패를 당한 것입니다.

당시 왜군은 조총을 지녔지만, 그것이 그리 효율성 있는 우월한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조총은 유효사거리 50 m이기에 우리가 활과 활촉을 많이 지녔더라면 먼저 선재공격도 가능하였슬 터인데, 돌을 던지는 육박전에서 조총의 무기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의병이 무기도 변변치 못한 상태에서 나아가 흥원진에서 왜구를 차단하란 것은 그 위급한 사정은 이해가 가나 무모한 죽음이 될 수 있다는 의병들의 생각이 도망가는 것의 생각이 아니었슬까요??

전투는 어디까지나 승리가 목적이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최상이지만 여의치 않을 땐 연안장정을 돌더라도 모택동 전법 중 하나인 빠지는 전법도 훌륭한 전법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고종원 형제의 의병의 용기와 그 충정을 기려야 합니다.
저는 영월에서 문화행사는 잘 모릅니다만 평창을 미루어보면 임란 당시 응암굴에서 왜구에 체포되자 응암굴 절벽에서 푸른 강물로 투신한 권두문 군수의 소실부인 강소사는 소문이 나자 선조께서 강절부(節婦)라 추존하였지만, 이 임란 420여 년이 지난 작년에 천동마을의 선각적 주민들에 의해 강절부님의 진혼제를 처음으로 올렸습니다.

이렇듯 또한 고씨굴에 피난하였다 체포되어 능욕을 당할 끔직한 일을 미루어 고씨굴 연못에서 자결을 한 고종원의 처 조씨에대한 진혼제도 드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매년 제의 예를 기려야할 이땅의 후예 후손들의 몫 입니다.

의병을 발하면 국가의 명령과 규율을 엄수해야 되지만 이 의병모집은 아직 세를 전열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강원도백의 무리한 명령에 의병활동을 시작도 못하고 의병장 고종경 어른은 의병장으로서 명령을 충분히 수행치 못하였다고 하여 형법에 의한 비운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일은 42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당 국가의 명이므로 고종경 어른의 형행은 복권되어야 하며 의병장 대열에 올라야 합니다.
강원도백의 잘못 판단으로 비록 미완으로 끝난 고종원 형제들의 의병활동은 국난의 어려운 형세에 국가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용기와 기백은 분명 의병으로 기록되어야 하고 앞으로도 영월의 상징으로 버금가야 할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 국가를 구하려는 구국의 그 기상과 충정은 우리들의 영원한 애국심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후손인 저로서는미완의 혁명장 고종경과 그의 형제들의 충정에 머리 숙여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는 엇그제 이 호구록의 번역을 하신 남천 권두문군수님의 직계12대 종손 분과 인터넷 대화에서 이 호구록내의 의병장 고종경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점을 다시 적어 알려드립니다.

위 호구록의 19일자 일기 하단에 고종원이 이야기하는 "나의 증조부 익장공"에 대해서는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고씨굴에 피난한 고종원일가는 제주고씨 화전군파(일명 횡성파)이며 아이디 "나무귀인"님이 말씀하신 고경명 의병장은 제주 고씨 장흥백파 입니다.
그럼, 삼도 관찰사를 하신 익장공 고경명 어른에 관한 권두문 군수의 표현에 좀 부정확한 면이 있지않나 하는 점 이다.

제가 화전군파 고씨(영월 5파)로 이때 영월로 이사를 하셔서 임 영월고씨라 불리워지며 종원의 후손들은 영월고씨 문곡파라하며
종길의 후손들은 정선 고씨라 불리워 집니다.

420년전 임란때 개인의 삶을 뒤로 미루고 목숨울 바쳐 조국의 국난극복의 길로 나서서 의병을 모집하여 국가의 존위에 힘쓰고자 하셨던 저의 윗대 제주고씨 화전군파 어르신들의 충정에 13대 문곡파 후손으로서 (영월 5파) 머리숙여 깊이 조의를 드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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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은 고씨동굴 이야기에 임란때 고씨가 피난갔다는 설명뿐인데 여기엔 이 지역 의병을 모아 의병활동을 일으킨 고종원 형제의 당시의 영월의 기상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또한 고씨동굴에 이러한 사연과 조씨부인의 禮를 지내줌도 후대인들의 아름다운 마덕이라 생각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도 애국자들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을 역사위에 보존하듯, 우리 평창도 미완의 의병장 고종길의 형행을 후대인 지금이라도 그의 형행지(刑行地) 평창에서는 그의 조국에 충정의 기상을 분연히 추모하고 기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당시의 유영길 강원도백의 판단부족으로 형행되었지만 고종원 형제는 임란당시 의병장 대열에 속하여야 하는 것으로
역사를 재조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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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저의 블로그 "후세백작의 지평" http://blog.daum.net/kkks1/376 에 있습니다.
                                                                                                    2016,02,16 高柱浩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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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것 하나 다시 써 올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신유박해당시 둘쨰형인 정약전은 흑산도, 정약용은 포항유배에서 보길도, 강진으로 2차 유배로 떠나지만 순교자 이승훈은 평창이씨이며 정약용의 매형으로  그의 처와 정약용의 바로 위의 형 정약종(신도회장)이 순교를 하였는데 이승훈은 우리나라 순교의 1호로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순교한다.
이승훈은 서울태생이지만 본관이 평창이씨로 구한말 평창이씨가 또한번 힘든 시기를 가졌었다.

저는 무교이지만 이러한 순교자 이승훈의 기념비를 평창 천주교내에라도,,아마 천주인들에겐 전국적 행사로 확대되어야 하며 평창이씨 문중도 이점에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란 생각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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