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선생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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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6-02-10 20:28 조회5,840회 댓글2건본문
글의 요지는 본 사이트의 " 3, 향토사 연구위원 3차 비지정문화재 현장조사(15. 10. 26) " 조사에 대한 에전 저의 글을 게첨 합니다.
봉평은 이조때는 강릉부 관할이었으며 강릉 권세가들의 최씨나 김씨 문중의 땅이 많았던듯 합니다.
당시 이원수 공은 판운수윤으로 함경도에서 전라도까지 조세의 9결중에 등급을 정하고 걷어서 배로싣고 조정의 마포나루까지 운송하는 직책이라 출장이 장기간 되는 것등에 사임당 신씨의 아버지는 고명 딸을 가까이 두기를 원해서 서울이 가장 가까운 강릉땅인 봉평에 집을 마련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원수공이 출장중엔 신사임당은 강릉 어머님의 병 시중을 들고 하였다.
왜, 이런 죠크도 있죠, 이공께서 대화에 다다르니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요기를 하고 밤 늦게 봉평 집엘 가야 하는데, 사임당 신씨가 강릉에서 않 왔슬것이란 느낌에 주막 뒷방에 하룻밤을 쉬어가라고 주막 기생이 유혹하는..그러나 이공은 곧바로 쉬지않고 밤길 50여리를 걸어서 봉평집으로가서 이이선생을 잉태하였다는 이야기에..
요즘같으면 스마트폰 한번 1분에 서로의 위치등을 알 수 있겠으나 당시로선 먼 출장에서 봉평 집으로 귀환할때 그날을 맞춰서 신 사임당도 대굴령재를 올라 백옥포리 집으로 당도하는...아마도 매번 서로가 같은날에 집에 당도하지는 못하길래 그런 유머도 생겨난듯 합니다만,,,추정의 백옥포리 생가터는 현재는 논이 아닌가 하며 당시 강릉 최준집씨 집터는 땅이란 의견도,,,
이율곡하면 모든 사람들은 오죽헌을 연상합니다.
하지만 그곳은 외갓집이고 이율곡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고 물으면 모두들 어리둥절할뿐,,,
그런데 봉평의 판관대는 율곡을 잉태한 곳이란 역사뿐이라 앞뒤의 이야기가 단절된 이상한 역사만 남아있다.
저의 글에 율곡학회의 율곡연표와 사임당의 연표를 대조해서 쓴 글엔 이율곡이 신사임당 결혼 12년차에 출생하고 신사임당은 이곳 봉평에서 18 년 생활하다 서울 덕수이씨의 시집 문중살림을 관장하려 수진방으로 이사한다.
이로서 율곡의 어릴적 여섯살까지의 6년간의 고향은 평창입니다. 물론 오죽헌의 생활시간이 더 많았겠지만 아버님 이공이 귀향할때나 긴 겨울동안 출장이 없으면 봉평에서 생활했으리라 이해해 봅니다.
그래서 이이의 어릴적 정서엔 이곳 평창의 (물론 당시로선 명주군이었지만,,) 고향에서 뛰놀던 서정이 담아있는 것입니다.
이후 율곡은 젊은시절 오대산을 지나며 진고개를 넘나들며 소금강에서도 공부를 하는며 아홉번의 구선 장원급제를 합니다.
저의 율곡이이선생의 고향은 평창입니다란 글의 아래 주소록을 클릭하시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http://blog.daum.net/kkks1/424 < 블로그,,후세백작의 지평>
(이 싸이트에 복사하여 정리하느니 차라리 그대로 보여서 글씨 크기나 색 구분으로 글의 이해도를 높일듯 하기에 글 주소를 게첨합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옛날 나의 친구 서주사를 장평쯤에서 만난듯한데 그는 청소년 수련원 공사장에 간다한다.
그 왈,,, 당시로선 이 수련원의 이름이 아직 정하지 않았다 하길래, 그거 간단하지 "율곡수련원": 하면 되는거야 하며 즉석에서 이야기 했지만 힘없는 그로서 될것이란 생각은 없었었다.
그러나 "율곡수련원"이라 명명하면 처음엔 사람들이 이상하다 생각하지만 이후 율곡의 고향이 평창이구나 하는 이유를 알게되는 것이다.
신사임당 수련원은 주문진에 있는데 80년대 당시로선 강릉에선 수련원정도야 하고 별 가치없이 생각해 그것에 예산을 낭비하는것처럼 느껴서 주문진이 그럼 우리가 수련원을 지을게요 하고 가져가 지금까지 주문진에 신 사임당 수련원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당시 국립 청소년 수련원보다 율곡 수련원이었으면 이곳 태백의 준령아래 평창은 성현이 태어난 명산의 고장으로 그 브렌드 가치를 높이는것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율곡 수련원'으로 개정하고 율곡의 어릴적 뛰 놀던 땅이 바로 백옥포리 수련원이란 점을 상기시켜 준다면 봉평은 대 학자를 탄생시킨 더한 명품마을로 거듭나리란 생각이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앞으로 율곡의 고향은 평창이란점으로 판관대및 봉산서재등에도 청소년 수련원은 바로 율곡이 뛰놀던 곳이었으며 그에게 이 고장의 기운과 정서가 함양되었다는 사실이 명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씁니다.
저의 이글이 황당하다면 율곡학회의 연표만 검색하여도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6,02, 10, 高柱浩 拜----------------------------
댓글목록
평창문화원님의 댓글
평창문화원 작성일
조언 감사합니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후세백작님의 댓글
후세백작 작성일
비유적인 글을 한 줄곁들입니다.
팔석정의 유래를 찾아보면 경치가 수려하여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부임하던차에 이곳에서 3일간 놀다갔다고 설명하는데,
그것은 아주 나쁜 표현입니다.
왜냐면, 양사언이 강릉부사 부임시에 팔석정을 거쳐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위의 표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市長의
부사란 분이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부임도 마다않고 타 군에서 놀다가는 그런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휴일을 쉬는 요일제도도 없었지만 그보다 팔석정이 위치한 봉평까지 강릉부 관할지역이라
타 군이 아닌 임지내의 순시중 유람이었지 업무를 팽계치고 임지를 벗어난 유희가 아니란 점이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고 좀 더 구체적이지 아니한 설명문은 요즘사람들에게 암묵중 봉평의 팔석정 위치가 평창으로
와전되어 연상하며 양사언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능력이 부족한 글이죠.
이렇듯 율곡당시에는 대관령을 넘어 진부, 봉평까지 강릉부 소속이었으며 1904년 관제개편시 평창으로 이관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곡 출생 당시에 그의 고향 봉평은 평창이 아닌 강릉이지만 ,,, 아마 오죽헌의 외갓집도 강릉이고
이곳 생가의 봉평도 모두 강릉이라, 강릉이란 표현을 의식치 않았던듯 합니다.
만약 그 당시 봉평이 평창이라면 생가 평창이란 단어는 기입되었슬 수도 있었겠으나 신 사임당이 서울로 이사할때도
봉평도 강릉땅이라 정확한 구분을 안 했던듯 합니다.
그 이후 구한말에 이르러서 봉평의 위치는 현 평창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더 쓸 월정사 8각9층석탑론에서 고구려의 북방형이라는 '70년 해체보수시의 감독 정영호 단국대 선생과
홍사준 문화재청 기록원(후일 부여 박물관장 역임) 이 두 사람의 불교사적 통찰력 없는 지식으로 동 탑은 북방형이고
고구려 형이라 하는 오점을 재 해석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진부면 소재의 월정사는 고려때엔 평창이 아닌 강릉땅이었으며 강릉 토후세력들의 소유의 산들이었고
동 월정사는 명주군왕 김주원 이후 범일국사의 제자들에 의한 그 중 보조국사 지눌은 굴산사지파의 범일국사의
선 불교 사상은 한국 최대의 종파로 확장하며 지눌의 선 사상은 지금까지 돈오돈수의 선 사상으로 한국불교에
선종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또한 원주의 거돈사도 범일의 제자승려들로 맥을 이루었다.
물론 역사서를 객체적 사실 하나 하나 따져보면 모순된것은 없었고 우리가 이렇게 종합해보지 못했던
사실들입니다.
감사합니다.